한국에서 검사의 범죄를 수사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검찰뿐이다. 경찰도 수사기관이지만 검사를 수사한 전례가 없다. 경찰이 혐의 확인을 위해 검사의 사무실이나 집을 압수수색하려고 영장을 신청하면 검찰은 ‘사건을 넘기라’는 지휘를 내리곤 했다. 무기력에 빠진 경찰은 검사 비리 관련 첩보가 들어와도 알아서 사건을 ‘상납’했다. 검사는 어떤 죄를 지어도 ‘친정’에서 조사받는 유일한 직군인 것이다.
경찰이 유진그룹과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의 측근에게 8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서울고검 김모 검사(51)를 수사하는 지금 상황은 초유의 일이다. 흥미로운 건 경찰 수사의 목표가 처음부터 김 검사였다면 수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조희팔의 은닉자금이 흘러든 정체불명의 계좌를 뒤지는 과정에서 우연히 김 검사가 걸려들었다. 경찰이 “김 검사의 계좌를 열어 보겠다”고 했다면 검찰은 또다시 “사건을 넘기라”고 했을 것이다. 검사만 영장청구권한이 있고 경찰은 검찰의 통제를 받는 현 제도 덕분에 검찰은 사실상 수사의 성역에 있다. 웬만한 중죄가 아니면 감찰을 받는 정도에서 사건이 무마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찰이 야심 차게 칼을 뽑았지만 검찰이 특임검사를 임명해 수사에 착수하면서 이번 사건도 주도권은 검찰로 넘어가 버렸다. 경찰 총수의 결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수사를 이어가기 어렵게 됐다. 특임검사가 김 검사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마당에 검찰이 뒤진 곳을 다시 수색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 검사가 소환에 불응할 경우 체포영장을 신청해도 검찰이 기각할 가능성이 크다.
김수창 특임검사는 “검찰이 직접 수사하겠다고 하는 건 이번 사건을 더 중요시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현직 부장검사가 연루된 사건이라면 ‘제 식구 감싸기’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기관이 수사해야 한다는 일반 상식과는 동떨어진 인식이다. 검찰에겐 ‘그들만의 상식’이 따로 있는 것 같다. 검찰에게 경찰 지휘 권한이 부여된 건 경찰 수사가 잘 진행되도록 관리하라는 뜻이지 경찰을 마음대로 부릴 권리까지 준 것은 아니다.
검찰은 김 검사 사건을 수사할 기회가 예전에도 있었다. 경찰이 2008년 검찰에 송치한 조희팔 수사 기록에는 김 검사의 비리 의혹이 포함돼 있었다. 검찰은 4년이 지나도록 가만히 있다가 경찰이 본격 수사를 시작하고 그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우리가 수사하겠다’며 뒤늦게 나섰다.
검사가 동료 검사를 수사한 결과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검찰은 ‘그랜저 검사’와 ‘벤츠 여검사’ 사건 때도 특임검사에게 수사를 맡겼지만 언론과 정치권에서 이미 제기된 혐의만 일부 확인하는 데 그쳤다. 특임검사가 실체 규명용이 아닌 ‘특검 방지용’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 간부가 연루된 의혹이 있었던 2010년 ‘서울 대원외고 불법 찬조금 수사’는 검찰이 경찰 수사를 중단시켜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이 학교 교장과 이사장이 학부모에게 찬조금 21억 원을 모금한 경위와 사용처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4차례 검찰에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검찰은 경찰에 이례적으로 “기소 불기소 판단도 하지 말고 즉시 송치하라”고 요구해 사건을 넘겨받은 뒤 “찬조금에 대가성이 없다”며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수사를 한 경찰은 “찬조금을 낸 학부모 중 검사장급 검찰 간부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검찰이 사건을 가로채 가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김 부장검사 외에도 검사 2, 3명이 추가 의혹에 휩싸인 이번 사건을 검찰이 직접 수사할 경우 검찰이 ‘꼬리 자르기’를 할 것이란 우려가 많다. 스스로 들춰내기 꺼렸던 사안을 경찰이 수사한다고 하자 가로채는 검찰을 보면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아직 험난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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