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매달린 묵직한 코코넛 열매가 어느 순간 떨어질지 모른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내년 경제 상황을 ‘코코넛 위기’로 정의했다. 나무 밑에서 잠시 정신 줄을 놓았다가는 갑자기 떨어진 코코넛 열매에 머리통을 얻어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 기업들이 느끼는 예측불허의 위기감에 잘 들어맞는 비유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TV, 휴대전화 등 20여 개 품목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음에도 임원들은 오전 6시 반에 출근한다. 창의와 혁신과 같은 근로의 질이 중요한 시대에 새벽 출근은 얼핏 아날로그 사풍을 연상시킨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소니, 노키아 등 글로벌 기업을 분석했더니 1등에 오른 순간 자만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새벽 출근은 ‘성공의 덫’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조직을 독려하는 일종의 ‘각성(覺醒)제’라는 것이다. 이러니 일본 기업에서 “스스로 위기를 진단하고 대처하는 한국 기업이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위기는 일반적으로 외부로부터 온다. 하지만 한국 기업 리더들은 의도적으로 기업 내부에 위기를 만들고 이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성과를 극대화한다. 고려대 마틴 헴메어트 경영대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한국식 경영방식을 정의한 저서 ‘타이거 매니지먼트’를 최근 한국 미국 영국 싱가포르에서 동시 출간했다. 그는 한국 기업에 특유의 ‘위기창조(Crisis creation) 리더십’이 있다고 진단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자동차 내수시장이 3만 대에 불과했던 1970년대 연산 30만 대 규모의 자동차 생산라인 건설을 발표하고 조직이 명운을 걸고 고유 모델 개발과 수출에 매진하도록 몰고 갔다. 반도체 산업에 뒤늦게 뛰어든 삼성그룹은 1980년대 일본이 6년 걸려 개발한 64K D램을 6개월 만에 내놓았다. ‘해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 창조 리더십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은 2류다. 그대로 있으면 3류, 4류가 된다”며 신경영을 선포했다. 이 회장은 2010년 경영에 복귀해 “지금이 진짜 위기다.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이 사라질 것”이라며 직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가 회장으로 일한 25년간 삼성그룹의 매출이 39배, 시가총액은 303배, 수출은 25배로 늘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리더가 위기의 징후에 눈을 감는 순간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회계 부정을 일으킨 엔론, 월드컴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몰락에는 단기 실적에 눈이 멀어 위기에 눈을 감은 전문 경영인들의 부패와 무능이 깔려 있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을 집필한 월터 아이작슨 아스펜연구소 최고경영자(CEO)는 “잡스가 주변 사람들에게 냉정하고 까다롭게 굴었던 것은 사람들이 조직 내에 편안하게 안주하는 ‘집단바보화(bozo explosion·무능한 사장이 무능한 임직원을 넘쳐나게 만드는 현상)’를 막기 위한 나름의 처방”이라고 설명했다. 잡스는 아이작슨에게 “정직하게 구는 것이 내 일”이라고 말했다.
국가 경영과 정치 리더십의 본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라 경제는 저(低)성장과 경기 침체, 922조 원의 가계부채와 늘어나는 복지 수요로 신음하는데도 대선후보들은 국민을 운운하는 정치적 수사와 함께 나라 곳간을 허무는 복지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증세(增稅), 기득권 노조의 양보, 약자의 자구 노력과 같은 고통 분담과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쓴소리는 하지 않는다. 주인인 국민 전체의 이익보다 눈앞의 정권 쟁취에 혈안이 된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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