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애인에게 받은 안개를 바람을 입고 옛 애인에게 받은 황사를 입고 나선다 변절기(變節期), 잿빛 웃음으로 낱장의 표정을 여미다
살갗을 떠나는 각질에 지는 꽃잎 하나씩을 짝짓다가 ―우리 언제 다시 천둥과 우레 눈보라 속에서 다시 만날까
―이 소란이 끝나고 누울 때 누가 승자인지 드러나겠지 그 많았던 오해와 모략과 끝끝내의 말들
오래 귀담아 들을수록 거짓은 내밀해서 점점 달콤해져만 가는 것인데 중독자여, 나는 1초의 삶을 위해 24시간 죽는가
깨지 않아도 좋을 오랜 꿈속에 갇힌 번데기처럼
지적인 멜랑콜리로 자욱이 젖어 있는 시집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에서 옮긴 시다. ‘지적인 멜랑콜리’라, 지적인 자수(刺繡)나 지적인 피부만큼이나 알쏭달쏭한 조합이다마는, 우아하면서도 드라이하면서도 격하게 감정적인 시편들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화자는 옛 애인에게 받은 속옷과 셔츠와 바지를 입고 집을 나서는데, 그 심정이 축축한 안개와 황사바람을 입은 듯하다. 그렇게 처량하고 불편하건만 변절한 그녀를 끝내 벗지 못하다니, 나는 벌레야, 벌레! 벌레 중에서도 번데기지. 이 징글징글한 중독, 옛사랑의 거짓 달콤함에 갇힌 벌레!
그래, 시인이여, 당신 속을 내 알겠네…. 내, 독한 ‘배갈’이라도 한 병, 같이 마실 시간은 없고, 보내주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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