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나고 본격적인 입시 시즌에 접어드니 친구들 모임에서 오가는 얘기도 입시로 시작해 입시로 끝난다. 바쁜 아빠들이 언제 그렇게 입시 정보를 축적했는지 대화의 절반가량은 못 알아들을 내용이다. 명색이 예비 고3 아빠가 만날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야” 같은 소리나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심기일전하고 입시 정보전에서 나름 직업정신을 발휘해 보겠다고 나선 지 일주일 만에 아내로부터 “그러다 혈압 오른다, 그만 손떼라”는 핀잔을 들었다.
의욕이 울화로 변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의 성적으로 갈 만한 대학 수준이 그간 품고 있었던 근거 없는 낙관에 훨씬 못 미친다는 현실인식일 게다. 하지만 더욱 열을 받게 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널을 뛰고 있는 입시제도다. 아이들이 실험용 쥐 신세라는 말에 공감한다. 교육당국과 대학들의 무책임한 입시제도 ‘실험’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당장 예비 고3이 처한 황당한 상황 몇 가지를 보자.
내년 수능부터 국어·수학·영어는 쉬운 A형과 어려운 B형 중 1개를 골라 치른다. 그러나 적지 않은 대학이 어느 형의 성적을 요구할 것인지, B형 선택자에게 가산점을 얼마나 줄 것인지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수험생들은 무작정 보험 드는 심정으로 B형을 준비하려고 사교육에 매달린다. ‘학습 부담 경감’이라는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대학들이 수시전형에서 A·B형 수능의 최저등급제를 어떻게 적용할 건지도 불투명하다. 최저등급제는 다른 요건을 충족해도 대학이 정한 등급 이상의 수능 점수를 받아야 합격시키는 제도. 상위권 대학은 대개 2등급 이상의 수능 성적을 요구한다. 대학들은 최저등급 기준을 낮추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요청을 묵살했다. 내년 수능에선 A형을 선택하면 1등급을 받을 만한 학생도 상위권 수험생이 몰릴 B형을 선택하면 3등급 이하를 받아 최저등급에서 탈락할 수 있다. 이처럼 평가 기준을 종잡기 어려워 재수생이 급증하리라는 우려가 크다.
예비 고3들은 한 과목을 특정 학기에 몰아서 배우는 집중이수제 1세대다. 가령 이과인 우리 아이는 집중이수제로 2학년에 화학Ⅰ과 생명과학Ⅰ, 3학년에 화학Ⅱ와 생명과학Ⅱ를 배운다. 3학년 때는 물리와 지학이 각각 Ⅰ과정만 개설된다. 따라서 3학년 때 물리Ⅱ나 지학Ⅱ를 공부하려면 혼자 힘으로 하거나 과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고교에서 물리Ⅱ를 안 배우고 이공계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도 내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고3과 예비 고3 중엔 의사가 덜 배출될지도 모르겠다. 2015∼2017학년도에 상당수 대학의 의학·치의학전문대학원이 옛 의·치과대학 학제로 전환한다. 이공계대 졸업생들의 의·치전원행(行) 러시, 기초의학 및 대학병원 고사(枯死) 위기 같은 부작용이 속출한 탓이다. 고3과 예비 고3이 학부를 졸업하는 2017, 2018년엔 의·치전원이 3분의 1만 남는다. 의료인력 수급을 고려해 2013학년도(고3)와 2014학년도(예비 고3) 의·치의예과 입학정원을 소폭 늘렸지만 없어질 의·치전원 정원엔 한참 모자란다. 예비 고3 중엔 예과 증원(增員)이 본격화하는 2015학년도 의·치대 진학을 위해 재수를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듯하다.
각 대학은 이달 말쯤 2014학년도 대입전형 시행계획을 공개한다. 입시를 1년(수시전형은 9개월)도 안 남겨 놓고 수험생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셈인데 그나마 믿을 게 못 된다. 대학들이 지난해 2013학년도 시행계획을 발표한 뒤 올 2∼8월에 느닷없이 전형 기준을 바꾼 사례가 971건에 달한다. 곧 선출될 새 대통령에게 ‘백년대계’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임기 동안에라도 지속가능한 교육정책을 세워 달라는 하소연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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