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3>매우 드라이한 출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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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정(1967∼ )

닥터 박 왜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거요 내 지금 비록 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침대 위를 기고 있지만 이곳은 분명 산부인과의 분만실이오 그런데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니 날보고 지금 똥을 낳으라는 말이오 똥 아닌 것을 낳으라는 말이오 닥터 박 어쨌든 난 지금 당신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어디 한번 죽을 힘을 다해 항문 끝에 힘을 주겠소

닥터 박 이곳은 화장실이 아닌 건 분명한데 난 지금 도저한 핏기가 묻은 희고 말랑한 똥을 낳은 것 같소 이 똥을 품에 안으며 난 이 희한한 똥과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하고 있소 이것이 자라서 진짜 똥이 되어도 내 사랑은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처럼 희고 말랑할 것 같음도…닥터 박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당신의 조치는 매우 적절하였던 것 같소


말랑말랑 따끈한 아기를 막 낳아 품에 안는 순간, 산모의 온몸에 솟구치는 사랑! 갓난아기의 냄새와 감촉과 체온이 ‘똥’만큼이나 후끈한 사랑의 이 진저리!

성미정의 시들은 거침없고 유쾌하다. ‘이것이 자라서 진짜 똥이 되어도 내 사랑은’같이 뭉클한 구절도 있지만, 짐짓 능청스럽게 시를 여는 ‘닥터 박’부터 빙긋 입술 끝이 올라가면서 웃음을 예감하는 독자의 기대를, 시인은 이번에도 저버리지 않는다.

산고(産苦)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그렸는데, 항문이니 똥이니 피니 하는 시어들이 독자를 비위 상하게 하거나 움찔하게 하지 않는다. 몸과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건강하고 대범한 덕분이다. 삶! 몸이 있어서 고통도 받고 쾌락도 받는.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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