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Hot 피플]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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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5일 03시 00분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인도 언론정보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인도 언론정보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11월 29일 유엔총회에서 ‘유엔 비회원 옵서버 국가’ 지위를 획득했다. 찬성 138, 반대 9, 기권 41이라는 압도적 지지였다.

팔레스타인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국가(state) 출생증명서’를 받았다.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무려 65년이 걸린 험로였다. 비록 유엔총회에서 표결권이 없는 ‘비회원 옵서버 국가’의 지위지만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에서 처음으로 ‘단체’에서 ‘국가’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면 검은 철조망 무늬의 케피야(사막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이 쓰던 두건의 한 종류)를 쓴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떠올린다. 하지만 서방 언론은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 승격에 대해 아라파트와는 달리 항상 ‘양복’을 입는 마흐무드 압바스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기여한 온건파

압바스 수반은 예루살렘 헤브론 티베리아스와 함께 유대교의 4대 성도(聖都)로 꼽히는 갈릴리 지방의 도시 사페드에서 1935년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 대신 영국이 통치(1917∼1948년)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이름난 치즈 상인으로 유대인 동업자와 함께 도매 식료품점을 경영하고 있어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순탄했던 압바스의 어린 시절은 1948년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으로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한 것.

압바스의 고향 사페드 역시 그해 5월 중순 하가나(유대 방어 조직체)에 정복돼 그의 가족은 인접 국가인 시리아로 피했다. 그는 시리아의 국립 다마스쿠스대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옛 소련의 파트리스 루뭄바대에서 ‘나치즘과 시오니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관성’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 논문은 극우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 희생자 수를 축소했고 유대인과 나치 사이에 협력 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담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압바스는 2003년 5월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홀로코스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잔혹한 만행이고 비단 유대인뿐 아니라 인류에 대한 끔찍한 범죄”라고 말해 반(反)유대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 2005년 2대 수반 올라… 하마스와 대립

압바스는 1959년 카타르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아라파트 전 수반과 함께 훗날 팔레스타인의 주류 정당이 될 ‘파타’(아랍어로 정복을 의미)를 결성함으로써 처음으로 정치에 발을 내딛는다. 그는 아라파트와 요르단 레바논 튀니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금 모금책, 외교 및 내정담당자 등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2인자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압바스가 국제사회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 좌파와 평화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주창하는 비둘기파(온건파)란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부터다. 그는 실제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벌어진 이스라엘 측과의 극비접촉 단장을 맡아 1993년 9월 중동평화의 초석이 될 오슬로 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94년 7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출범하고 아라파트는 공로를 인정받아 9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던 아라파트 전 수반이 사망했다. 자연히 중동평화의 열쇠를 쥐게 될 차기 수반직에 이스라엘을 비롯한 각국의 이목이 쏠렸고 팔레스타인 주민 62%의 지지를 받은 압바스가 2005년 1월 제2대 수반에 올랐다. 대화와 협상을 중요시하는 그는 취임 연설에서부터 팔레스타인의 모든 무장 단체에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요구했다. 국제사회는 온건파 수반의 등장을 환영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투쟁을 주장하는 무장정파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내 무장 단체들은 그의 등장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 ‘美의 꼭두각시’ 비난에도 평화노선 지켜

특히 2000년대 정치조직으로 몸집이 커진 하마스가 2006년 압바스 수반이 이끄는 온건 파타당을 물리치고 팔레스타인 의회의 제1당이 됨으로써 내분은 더욱 격화되었다. 2007년 압바스가 하마스와 파타의 연립내각을 해산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이에 하마스는 가자지구에 있던 파타당 관련 인사들을 몰아내고 가자지구를 실제적으로 장악했다. 현재 팔레스타인은 압바스가 이끄는 파타당이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각각 지배하고 있다.

대화와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해묵은 분쟁을 해결하길 원하는 압바스 수반은 종종 자국민에게서도 ‘친미, 이스라엘주의자’,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는 공개적으로 인티파다(무장봉기)는 ‘팔레스타인이 여태껏 쌓아 온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반대하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몇 안 되는 팔레스타인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올 10월에 가진 이스라엘 채널2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내가 팔레스타인 수반으로 있는 한 어떠한 폭력적인 무장투쟁도 없을 것”이라며 “우리는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외교적 방법, 협상 그리고 평화적인 저항운동을 통해 우리의 뜻을 관철할 것”이라며 ‘평화 노선’을 견지할 것을 명확히 밝혔다.

○ 팔레스타인 ‘국가 지위’ 획득 열매 맺어

역사적인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 자격 획득은 그의 온건 정책이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압바스 수반은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우리의 뜻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투쟁은 필요하지 않았다”라고 강조했다. 외국 유력 언론들도 압바스 수반의 ‘승리’라고 앞다투어 보도했다.

2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 행정 수도 라말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는 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팔레스타인인들의 단결과 화해’를 강조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팔레스타인의 통합과 화해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모두 분열의 종식을 원하고 있습니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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