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화성]흔들릴 때마다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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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6일 03시 00분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밥, 물, 불, 쌀, 입, 술, 벼, 옷, 집, 잠…. 글자 하나로만 된 단어들은 원초적이다. 본질을 곧바로 가리킨다. 그 뜻도 ‘먹고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 사람 사는 게 뭐 별건가. 단순하다. 그냥 먹고, 입고, 잔다.

인간의 의식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 긴 개 긴’이다. 사람의 입∼위∼창자는 여전히 하나의 생산 라인이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면 항문으로 똥이 되어 나온다. 인풋(input)-아웃풋(output) 과정일 뿐이다. 인간과 지렁이의 생산 라인이 뭐가 얼마나 다를까.

연말 출근길, 여기저기 길가에 취객이 토해놓은 빨간 토사물이 부쩍 눈에 띈다. 쯧! 쯧! 혀를 찬다. 애써 눈길을 피한다. 그러다가 문득 가슴이 짠해진다. 오호라! 어젯밤 또 한 인간이 강호의 쓴맛을 봤구나! 대한민국 남자들을 키운 건 8할이 소주와 삼겹살이다. 그들은 간과 쓸개를 집에 놓아두고 다닌 지 오래다.

술은 보슬비다. 조금씩 몸에 젖어야 맛있다.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느낌이 아득하다. 이놈한테 반항할 생각은 아예 않는 게 좋다. 조금 덜 마시겠다고 잔머리 굴렸다간 큰 돌 맞는다. 가슴에 얹히기 십상이다. 신새벽 타는 목마름에, 머리가 깨지도록 아플지도 모른다.

젊을 땐 힘으로 마신다. 욱여넣는다. 마른 논에 물 대듯, 꿀∼꺽! 꿀꺽! 목울대를 넘긴다. ‘공술래공술거.’ 빈 잔이 가자마자, 빈 잔이 잽싸게 돌아온다. 오가는 소리들이 왁다글왁다글하다. 영락없는 풋술꾼들이다.

나이 들면 술이 어느 날 안겨온다. 쩍쩍 입에 달라붙는다. 그땐 몸의 세포가 나팔꽃처럼 우우우 문을 연다. 몸에 천 개의 입술 꽃이 연꽃 벙글듯 열린다. 그래서 술은 ‘입 달린 물’이다. 오죽하면 ‘도깨비뜨물’이라고 했을까.

술은 리드미컬해야 한다. 몸의 리듬과 맞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흔들릴 때마다 한 잔 마신다. 그냥 몸에 따라 때론 훌쩍, 때론 홀짝 마신다.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때론 자진모리로 마신다.

술친구가 절묘한 것은 그 리듬과 호흡이 서로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데 있다. 시소와 같다. 오래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한판의 춤마당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거나 같다. 오가는 이야기는 반주 리듬이고, 흐릿한 조명과 주위 떠들썩함은 어릴 적 동무들과 뛰놀 때의 흥겨움이다.

땅거미 어둑어둑 퇴근길, 눈이 내린다. 어찔어찔 어지럽다. 발걸음이 흔들린다. 적막강산. ‘허허 쓸쓸.’ 어찌 방앗간을 지나치랴. 술청은 어느새 훈훈한 모과색 불빛이다. 저마다 가슴 부여안고 잔을 기울인다. 밑도 끝도 없이 피어오르는 말, 말들….

세상살이와 밥벌이에 지쳐 늙은 노새처럼 투레질한다. 대통령선거 따윈 안줏감으로도 오르지 못한다. 하품 난다. 어쩌면 후보들이 그렇게 ‘졸면서 책 읽는’ 소리만 하는지. 옆자리의 ‘대선 격론’ 듣는 재미는 진즉에 사라졌다.

가리산지리산 술청은 거나하다. 밖에선 우두둑! 눈 켜 부서지는 소리. ‘자고 깨는’ 짧은 꿈과, ‘나고 죽는’ 긴 꿈이 술과 버무려져 하나가 된다. 술이 익고, 사람들은 점점 술에 감긴다. 어우렁더우렁 엉긴다.

그래, 세상은 혁명을 하든 말든, 잔을 들어라! 상선약주(上善若酒). 술처럼 술술 사는 게 으뜸이다. 문득 과메기한테 미안하다. 내장을 다 버리고, 칼바람에 몸을 말려, 기꺼이 안주가 된 그의 한 생(生)이 숙연하다!

‘이 편지 받는 날 밤에 잠깐 밖에 나오너라/나와서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을 바라보아라/네가 그 별을 바라볼 때 나도 그걸 보고 있다/(그 별은 우리들의 거울이다)/네가 웃고 있구나, 나도 웃는다/너는 울고 있구나, 나도 울고 있다.’(정현종 ‘다시 술잔을 들며’에서)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술#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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