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막바지를 앞두고 자신의 말과 함께 가정, 회사, 국가 등 공동체의 말을 돌아보면서, 세배 덕담과 신년 사훈, 신년사, 나만의 각오 등을 새해의 언어로 준비하게 된다. 올해는 청소년 언어폭력과 자살이 국가적 문제로 드러나고 총선, 대선이 있어 말의 혼탁이 극심한 해였다.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배우려고 몰려오는데 한글날만 지나면 다시 타락하고 파괴된 한국어를 보여 주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최근 서울에서 8개국 언어학자들이 모여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각국은 자국어의 위축을 극복하고자 국어 능력이 국가경쟁력의 기초라는 신념 아래 자국어 보호 진흥에 힘쓰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은 9월 22일을, 헝가리는 11월 13일을 ‘자국어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로버트 필립슨 덴마크 코펜하겐 경영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과도한 영어 교육열과 원어민 영어교사 채용 제도를 비판했다. 덴마크의 영어교육은 자국민 교사만이 책임진다고 한다. 우리 학부모들은 한국인 영어교사를 백안시해서 영어교사들이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이 큰데, 우수한 한국인 영어교사들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같은 인물을 키워 낼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글레니스 필립바버라 뉴질랜드 마오리언어위원회 대표는 마오리어 보호정책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위세에 눌려 마오리어의 생존이 쉽지 않다면서, 현재는 가정에서 쓰이는 언어로서의 유지 전승도 어렵다고 고백했다. 언어학자들은 21세기 말 세계 언어 90%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결국 언어의 생존은 학문, 행정, 교육, 상업 분야에서 그 언어가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에 달렸다. 그런데 우리말도 요즘은 가정에서만 쓰이는 언어로 전락하고 있다. 학술 논저, 문화행사 안내문, 상품명은 영어 일색 혹은 영한혼용체가 흔하다. 우리 말글로 된 것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최근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영어공용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많은 학교에서 ‘잉글리시 존’을 만들어 영어공용화를 연습하고 있다. 대기업 중에는 영어로 회의하는 회사도 많다. 대학의 경우 국어국문학과, 국사학과에마저 영어 강의를 권장한다. 공공기관들은 ‘The 편한 일터’ ‘가래떡 day’ ‘Food Week’와 같은 기괴한 정책 명을 남발한다. 거리의 간판도 영어나 알파벳으로 덮여 간다. 이러다 보면 한국어도 마오리어처럼 생존이 위협받을 날이 다가오지 않을까.
올해도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해 세계 무역 규모 8위에 진입했다는데, 사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의무교육을 통해 일제강점기 80%에 달했던 문맹률을 낮춘 데 힘입은 것이다. 한글 덕분에 한강의 기적, 경제대국도 이룬 것이다. 이제 한류가 가수 싸이의 ‘말춤’으로 상징되는 대중문화에만 머물지 않게 하려면, 국제화 시대에 학문, 행정, 교육, 상업 분야에서 한국어가 부족함 없이 쓰이도록 수준 높게 가꿔야 한다.
내년에는 한글날이 공휴일이 된다. 한글날에만 국어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365일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바르고 고운 국어생활에 힘써야 할 것이다. 세계 8위 경제대국답게 한국어를 국제어로 고급화하는 일에 지식인, 공무원, 언론인, 기업인이 앞장서야 한다. 아울러 외국인 150만 명이 거주하고 매년 2만 명이 귀화 신청을 하는 우리 상황에서, 다문화시대의 외국인들과 그들의 모국어도 이 땅에서 잘 보전시켜야 할 것이다. 외국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이중 언어 생활자로 자리 잡아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게끔 사랑으로 보듬는 일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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