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반값등록금보다 급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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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7일 03시 00분


천광암 경제부장
천광암 경제부장
조지 워싱턴,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재커리 테일러, 밀러드 필모어,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루 존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해리 트루먼 등 9명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모두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 둘째 대학 문턱을 밟지 못했다.

이들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성장시키고 수성(守城)하는 데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장애가 됐을까. 아니다. 워싱턴이나 링컨을 능가할 만한 대졸 출신 대통령이 서너 명만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대학은 고사하고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앤드루 존슨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상대 후보는 “무학(無學)의 존슨을 대통령으로 뽑는다면 미국의 수치”라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존슨은 이렇게 응수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가 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멀리 미국의 사례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만 해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대학 졸업장을 중시한다. 고졸 출신은 임금과 승진 면에서 심한 차별을 받는다. 아니 채용 단계에서부터 높은 콘크리트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고졸이 찬밥 신세인 것은 대선공약에서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문재인 두 유력 대선후보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대학등록금을 반값으로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고졸 출신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공약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선후보들은 비싼 등록금, 즉 ‘학비 인플레이션’이 우리 대학 교육의 가장 큰 문제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훨씬 더 구조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 너도나도 대학 졸업장에만 목을 매는 ‘학력 인플레이션’ 문제다.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이웃 일본과 비교하면 20%포인트가량이나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가운데서도 단연 선두권이다.

대졸자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자리만 있다면 학력 인플레이션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대졸자 취업률은 2005∼2009년 60%대에서 2010년 이후에는 50%대로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려왔다. 더구나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 조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어서, 대졸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신규 일자리는 더 줄어들 것이다. 코미디 같지만 이런 와중에 중소기업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다. 대학 졸업장이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만 높여 놓은 탓이다.

등록금이 반값으로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대학 진학 희망자들이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경제학 법칙이다. 대졸자 일자리 시장이 좁아지는 가운데 반값등록금으로 인해 대학문이 넓어지면 우리나라 대학은 ‘깔때기’ 모양이 될 것이다. 대접에 바늘구멍 하나 뚫어 놓은 것 같은 깔때기 안에 젊은 세대를 마구 밀어 넣는 것이 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일까.

더구나 대학 반값등록금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매년 천문학적인 재원이 필요하다. 정치권이 이번 대선에 쏟아내 놓은 선심성 공약들을 이행하려면 예산 구조조정과 증세(增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재정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부가 빚을 내서 재원을 마련하다 보면 결국은 젊은 세대의 부담이 된다. 그런데도 유력한 대선후보들이 반값등록금을 마치 젊은 세대들에게 선심이라도 쓰듯이 공약하는 것은 눈속임이다.

고졸 출신이 LG전자 사장이 돼도 ‘신화(神話)’가 되지 않는 사회, 이력서 작성용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취업스펙을 쌓는 데 대학 4년을 허송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이것이 청년에게 진정으로 꿈을 주는 대한민국상(像)이 아닐까.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
#반값등록금#대학#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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