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임원’ 타이틀을 자랑해 온 선배가 연일 신문에 나오는 자신의 보스를 비호하고 나섰다. 후배들이 “그렇다면 오늘 나온 비리 혐의는 또 뭐냐”고 따졌다. 대학 시절 동아리 선후배 사이니까 있을 수 있는 논쟁이었다.
“회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선배를 보면서, 남자는 궁금해졌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집념이 과연, 먹고살려는 방편인지, 아니면 정말 믿기 때문인지. 평가가 좋지 않은 오너에게 저런 충성심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선배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회장과의 추억을 전할 때에는 울먹이기까지 했다. 바위 같은 믿음이든, 혹은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믿기로 했든 진심은 진심이었다.
궁금한 대상이 바뀌었다. 충성을 다했으니까 임원으로 발탁된 것일까, 아니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남자는 선배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임이 끝날 때까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디서나 ‘맡겨만 주십시오’ 스타일 상사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 맹목적인 혹은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로 더욱 단단해지는 충성심이야말로 출세의 첫 번째 조건인 것 같았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올라 한배에 탔기 때문에 공동운명체 의식을 갖게 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토대가 의식을 규정한다니까.
남자는 집 근처에 이르러서야 진실이 복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사자의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충성심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인정’을 통해 최종 완성된다는 진실.
인정은, 이따금 그것을 받는 자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대의라는 명분 아래 초개와 같이 자신을 던져 버리게 하는 무모함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인정 혹은 사랑을 받는다는 확신은 그래서 때로는 위험한 것이다.
결국 진실은 두 가지의 결합인 셈이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 출세해 그만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지금껏 윗분들을 감동시킬 정도의 충성심을 발휘해 본 적이 없다. 인정받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소외감을 느끼는 쪽이었다.
그는 아파트 입구의 가게에서 맥주와 안주를 샀다. 어쨌든 상사의 인정을 얻으려면 능력 외에도 소중한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렇다면 출세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 그건 십중팔구 가족이 아닐까.
그렇게 합리화하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개운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씁쓸해졌다. 남자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지금 다 왔습니다. 보스.”
그는 아내에게 방금 전의 결론을 들려주고는 확인받고 싶었다. 과연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지. 그게 확실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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