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경제민주화도 분배도 성장 없으면 모래성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11일 03시 00분


한국 경제가 도약과 침체의 중대 기로에 섰다. 연평균 7∼8% 성장시대는 김영삼 정부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 연평균 4%대, 이명박 정부에서 약 3%대 성장을 하며 15년째 내리막길이다. 올 3분기(7∼9월)에는 1970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6개 분기 연속 ‘전기 대비 1% 미만의 성장’이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다. 내년도 “3% 성장에 턱걸이만 해도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망이 어둡다. 한국 경제에는 저(低)성장과 장기불황, 초고속 고령화 같은 ‘경제 절벽’의 위기를 돌파하고 경제를 일으켜 세울 새로운 리더가 절실하다.

어제 열린 경제와 복지 분야 대선후보 TV 토론회는 경제 대통령의 자질을 시험하는 기회였다.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경제 비전과 정책을 들고 무대에 올랐지만 성장 담론은 뒤로 밀리고 경제민주화 등 이념성 논쟁이 주 쟁점으로 부각돼 경제 회생을 위한 커다란 밑그림을 내놓는 데는 부족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 타개를 위한 정책을 묻는 질문에 문, 이 후보는 “재벌 위주 부자감세 때문”이라며 ‘경제민주화’를 모범답안처럼 답했다. 이 후보는 “재벌을 해체하겠다”며 가장 강도 높은 재벌 개혁을 주장했다.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에서 대기업 개혁은 중요하다”고 했지만 “재벌 죽이기 정책은 투자 위축 및 경제성장률 저하와 일자리 감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다른 시각을 드러냈다.

소득 불평등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화된 시장에서 기업들은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세계 각지로 이동하고, 자동화 및 정보기술은 저부가가치 육체노동에 대한 수요를 크게 줄였다. 대기업 때리기의 경제민주화가 특효약일 수 없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살아 있었고 대기업 규제가 강했던 노무현 정부에서 오히려 소득 불평등이 악화했다. 대기업의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출총제를 부활한다고 해서 소득 불평등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대기업집단의 부분적 해악만 확대해 그것만 수술하면 경제가 잘 굴러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경제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위험한 모험주의다.

문재인 후보는 “성장이 일자리 만드는 시대는 지나갔다. 좋은 일자리가 성장을 이끈다”며 “공공서비스 일자리 40만 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70만 개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금 쓰는 공공 일자리와 일자리 나누기만으로는 소비와 성장의 촉진을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운 부가가치가 만들어지는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하려면 대기업의 탈법과 불법을 막는 일과 함께 소득과 일자리를 늘려 사회적 약자를 일으켜 세우는 포용적 성장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성장을 이끌 좋은 일자리는 투자 증대를 통해서 만들 수 있다. 그런 일자리는 서비스산업의 고도화 및 새로운 서비스 시장의 창출을 통해 가능하다. 요컨대 불필요한 규제를 풀어 서비스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를 유도해야 한다.

박 후보와 문 후보 간에 정권 실정 논쟁도 펼쳐졌다. 박 후보는 “양극화와 중산층 붕괴가 가장 심각했던 때는 참여정부였다”고 지적했다. 문 후보는 “양극화 민생파탄도 이명박 정부에서 훨씬 심해졌다”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미래 성장 비전에서는 낙제점에 가까웠다. 약속이나 한 듯이 성장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처럼 유권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공약에 매달렸다.

박 후보와 문 후보는 세출 절감, 세제 개편, 복지행정 개혁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주장했으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증세(增稅)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 후보는 “고소득층에 대해 증세하고 무상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박 후보는 “부유세 걷어서 조성한 재원으로 무상의료 하겠다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맞받아쳤다. 이 후보는 “기초수급생활자의 채무는 100% 감면해주는 게 맞다”며 “재원은 고소득자 증세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증세로 늘어나는 세금만 보고 투자 위축 등으로 줄어드는 세수 감소 효과를 무시한 균형 잃은 주장이다. 부채 탕감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규범의 뿌리를 흔든다.

세계 경제위기로 기업은 투자를 망설이고 빚에 허덕이는 가계는 지갑을 열 여력을 소진했다. 수출은 선방하고 있지만 투자와 소비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아 전체 경제에 온기가 돌지 않는다. 자영업자는 생활고에 신음하고 청년들은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된다. 세수가 줄면 복지에 쓸 나라 곳간도 텅텅 빈다. 달콤한 약속보다는 성장의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고통 분담을 요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리더다. 파이를 키우는 성장 없이는 분배도, 경제민주화도 불가능하다.

이번에도 토론의 원활한 진행을 방해한 것은 이 후보였다. 이 후보는 복지와 관련한 질문 시간에 박 후보가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받은 6억 원에 대한 세금을 물지 않았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지적했다. 토론의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 후보는 자신이 당선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경제#토론회#박근혜#문재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