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싸이의 ‘反美 랩 사죄’ 음미해볼 사람 많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11일 03시 00분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말춤을 볼 수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9일 워싱턴 국립건축박물관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인 워싱턴 자선공연’에서 가수 싸이의 공연을 지켜봤으나 말춤을 추지는 않았다. 싸이가 2004년 신해철이 이끄는 록밴드 ‘넥스트’의 래퍼로 출연해 부른 “미군과 그 가족들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자”는 반미(反美) 랩이 미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싸이는 공연에 앞서 “8년 전 일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백악관은 싸이를 자선 공연 행사에 초청하지 말아야 한다는 청원을 물리치고 예정대로 싸이를 초청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싸이의 반미 노래를 보도하면서도 “당시 반미주의적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 노래가 탄생했다”며 시대 상황을 곁들였다. 백악관과 미국 언론의 차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랩 가사를 읽은 미국인들은 싸이와 어울려 말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가셨을지도 모른다.

싸이는 2002년 효순 미선 양 사건과 관련해 미군 장갑차 모형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반미 시위에도 출연했다. 언제부터인가 남보다 ‘정치적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반미 성향을 내세우는 대중 연예인이 종종 있었다. 서강대 철학과 출신의 가수 신해철이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 버클리음대에 유학한 싸이도 그런 사람들과 자주 어울린 것이 사실이다.

“미군과 그 가족들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자”는 가사는 미국인이 아닌 우리가 들어도 섬뜩하다. 그런 가사는 부르는 사람은 물론이고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황폐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싸이의 노래를 우리만 들었다면 그가 과거 시류에 휩쓸려 부른 반미 랩이 지금 와서 이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노래는 이제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가 지켜보는 한국이 됐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골 장터에서 창을 하는 사람과 방송에 나가 노래 부르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대중을 상대하는 사람에게는 무대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금기가 있다. 한국에서만 듣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세계가 함께 듣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같을 수 없다. 일본과 중국을 혐오하면서 일본과 중국에서 한류 스타가 되겠다는 연예인은 어리석다. 반미도 마찬가지다. 미국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미국을 장난치듯 저주하는 것은 경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싸이의 사죄를 교훈 삼아 한류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우물 안에 머물렀던 우리의 자의식을 고양(高揚)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싸이#반미#말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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