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기사 보도 주무 부장인 나조차도 ‘쓸 만한 구석’을 찾기 힘든 18대 대선 레이스. 종착점까지 5일밖에 안 남았으니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되돌아본다.
동토에 핀 꽃, 지역감정 완화
안철수 전 후보가 주장한 ‘새 정치’가 대선에 순기능을 했을까? 그는 출마선언문에서 “정치개혁은 선거 과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대선 막판에 쏟아지는 포퓰리즘 공약과 흑색선전, 뜬금없는 국정원 여직원 감금과 댓글 진실게임까지….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 측 모두 ‘안철수의 새 정치를 존중한다’라고 했지만, 그가 주장한 ‘선거 과정의 쇄신’ 따윈 없었다. 더구나 안 전 후보마저 대선 이후까지도 ‘새 정치의 아이콘’으로 남을지 알 수 없다. ‘대선 끝나면 출국하겠다’라는데 다시 귀국할 때도 여전히 ‘신상(품)’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을지….
하지만 동토(凍土)에도 꽃은 피는 법. 이번 대선에는 많은 이가 간과했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있기는 있다. 지역감정 완화다. 동아일보와 리서치앤리서치(R&R)가 1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호남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율이 11.8%를 기록했다. 이대로 가면 민주화 이후 처음 보수후보가 호남에서 두 자릿수 득표를 할 가능성이 크다.
같은 조사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TK(대구·경북) 지역에서 21.2%를 기록했다. 이 지역에서 17대 대선 때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6%대를 기록했다. 문 후보는 PK(부산·경남)에선 고향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30%가 넘는 괄목할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인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흡사 ‘코트 체인지’(이훈평 전 의원)를 하듯, 상대 진영 후보를 지지하는 모양새도 시너지를 내고 있다. 이제 동서화합은 큰 고비를 넘게 됐다고 말하면 지나친 예단(豫斷)일까.
문제는 남남(南南)화합이다. 박, 문 후보 모두 ‘국민화합’과 ‘사회통합’, ‘100% 대한민국’ 등을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50% 대한민국’도 요원하다. 두 후보 진영은 경쟁심이 아니라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어느 쪽이든, 이긴 쪽은 진 쪽에 흔쾌히 손을 내밀 자세가 돼 있지 않다. 진 쪽은 이긴 쪽이 손을 내밀더라도 마음으로 맞잡을 준비가 안 돼 있다. 직간접으로 선거에 간여한 사람들뿐 아니라 단순 지지자들의 반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래선 선거전의 종전(終戰) 축제일이 돼야 할 12월 19일이 또 다른 ‘5년 전쟁’의 개전 선포일이 될 수밖에 없다.
당선과 동시에 레임덕 시작
한국 대통령이 유난히 빨리 레임덕에 빠져드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 그는 새로운 5년 전쟁의 전장에서 비켜나게 된다. 대통령 당선자의 관심은 당연히 국정에 쏠리겠지만, 전쟁을 치른 두 진영에선 ‘차기 전쟁의 리더’가 누가 될지에 눈을 돌린다. 특히 패배한 쪽에선 발호하는 승장(勝將)들을 보면서 5년 후를 절치부심하게 된다. 어쩌면 대통령 당선일이 바로 레임덕이 시작되는 날일 수도 있다.
선거 기사 주무 부장으로 대선을 치르는 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만, 이런 악순환은 이제 그만 봤으면 한다. 그 고리를 끊을 사람이 있기는 하다. 바로 18대 대통령 당선자다. △친박이든, 친노든 함께 선거를 치른 아군에 상대 진영보다 엄한 잣대를 들이대고 △패배 진영과 그 지지자들을 더 힘껏 껴안으며 △말뿐이 아닌 진심의 ‘대탕평인사’를 하면서 △임기 초부터 개헌이든, 결선투표제든 5년 전쟁의 고리를 끊을 제도적 보완을 서두른다면 아직도 희망은 있다. 5년마다 되풀이돼 온 한국 정치 비극의 막을 내릴 희망이. 늘 그렇듯, 동토에도 꽃은 피는 법이니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