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0>순창고추장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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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고추장
―이인철(1961∼ )

이슬을 닦고 장독뚜껑 열면
곰삭고 있는

하나

저렇게 붉으면
저렇게 뜨거우면
사랑처럼 단내가 풍풍 나는구나
강천산 단풍보다 더 싱싱한 색이 돋는구나

섬진강 한 굽이의 샘물 냄새
물씬
물씬
솟구쳐 오르고
양푼에 곰삭은 해 한 수저 떠넣고
붉은 밥을 비비면
칼칼한 입맛
고추씨 같은 별빛과
왕대나무숲 붐비는 바람소리
담 넘어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의 가는 손
들린다

뜨거웠던 시절에
은어떼처럼 되돌아오는

제대로 잘 담가 ‘자∼알’ 익힌 진짜배기 태양초고추장! 그 고운 빛깔 눈에 삼삼하다. 맵고 단 냄새가 훅 끼치며 입맛 돋우는 시다. 조선조 중엽 이래, 우리 한반도 사람에게 고추장은 영원히 잃을 수 없는 고향 같은, 어머니와 같은 식품이다. 우리의 DNA에 각인된 고추장 맛! 순창이 고향인 듯한 화자에게 순창고추장은 고향의 맛이고 엄마 손맛이어서, 마치 태어난 데로 돌아가기 마련인 은어처럼, 그리움의 물살을 타고 둥실둥실 섬진강 옆 청명한 고향 정경이며 가녀린 어머니에게로 흘러가게 한다. 복되어라, 고향과 어머니가 건재한 사람!

고추장을 보면 뭔가를 비벼 먹고 싶고, 뭔가를 비벼 먹을 때 고추장 한 숟가락이 없으면 서운하다. 고추장 없는 비빔밥은 노른자 없는 계란프라이다. 우리 인생의 고추장은 뭘까? 내 생에 고추장 같은 사람은 누구누구일까….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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