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다음 날인 2007년 12월 20일. 전직 검찰 고위직 인사 A 씨는 이명박 당선자의 핵심 측근과 마주 앉았다. “당선자가 보내 뵙자고 했습니다. ‘형님(이상득 당시 의원)’과도 모두 상의가 됐습니다.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맡아주십시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가동되고 주요 기관, 부처장의 하마평이 나오던 2008년 1월. A 씨는 이 당선자 측의 다른 핵심 측근과 다시 마주 앉았다. “국정원장 말고 급을 낮춰 다른 곳에서 새 정부를 위해 일을 해주세요.” 각종 동의서를 제출해 놓고 기다렸지만 막상 조각(組閣)이나 고위직 인사 때마다 “이번에는 미안하게 됐다. 좀 더 기다려 달라”는 전갈이 왔다. 정권이 출범한 지 1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이 대통령의 핵심 중의 핵심이란 최측근한테서 연락이 왔다. “정말 미안하게 됐다. 출신지가 우리 쪽(대구 경북)이 아니어서 반대들이 많다. 양해를 해 달라.” 이 최측근은 비리 혐의로 현재 감옥에 있다.
며칠 전 저녁 모임에서 대통령 선거가 화제에 오르자 A 씨는 이같이 지난 일을 꺼내면서 “‘인사가 만사’란 것은 그토록 평범한 진리이지만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나 보다”라고 했다. 그는 “벼슬을 탐낸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을 들쑤셔놓고 나중엔 출신지를 운운하는 걸 보면서 ‘이 정권도 성공한 정권은 못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A 씨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실책이 인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력이 아닌 지연 학연이 인사의 제1 원칙이 됐고, 엉뚱한 인사들이 중용되면서 인사 시스템이 무너져 내렸다. 특히 검찰은 ‘검붕(檢崩·검찰 붕괴)’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한 검찰총장 후보자는 ‘스폰서 검사’ 논란으로 인사청문회를 치르자마자 낙마했고, 직속 부하에게 들이받혀 불명예 퇴진하는 검찰총장까지 나왔다. 심지어 “각 기수의 일등부터가 아닌 꼴찌부터 발탁을 하다 보니 줄줄이 망신인사가 됐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이 정권 들어 임명된 3명의 검찰총장이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진기록도 수립됐다. 경북고 출신의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2008년 3월 이후 3번의 인사에서 드러내놓고 ‘TK 중심 인사’를 해 검사들의 전공을 몽땅 바꿔놨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별수사의 최고 정예부대라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현 정부 들어 주요 정치적 사건들에서 끊임없이 표적수사, 봐주기 수사 논란을 낳았다.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는 강도 높은 검찰 개혁 공약을 발표했다. 박 후보의 개혁안 핵심은 대검 중수부 폐지, 고위공직자 비리 척결을 위한 상설특검제 도입 등이다. 문 후보는 대검 중수부 폐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등을 제시했다. 두 후보 모두 검찰 권력의 분산과 견제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대통령의 의지다. 상설특검이든 공수처든 새로운 수사기구를 만들어도 그 기구의 장(長)을 대통령이 입맛대로, 학연이나 지연을 따져 임명한다면 옥상옥(屋上屋)이 될 뿐이요, 또 다른 형태의 권력기관이 될 것이 뻔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인사가 만사’란 경구를 되새기고 곱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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