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대통령 선거는 50대 이상 유권자 수가 20, 30대를 처음 앞지른 ‘시니어 우위 선거’ 원년이었다. ‘투표율이 높으면 진보가 이긴다’는 선거 통념도 중·고령 유권자층이 두꺼워지면서 깨졌다. 산업화부터 민주화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중·고령층은 “서민의 어려움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의 ‘생활비 반값 공약’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부자가 되기도 전에 늙어버리는 나라의 곳간 걱정이 ‘반값 정치’의 유혹보다도 컸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문 후보보다 강도는 덜하지만 ‘반값 공약’을 내놨다. 소득계층별로 장학금을 차등 지급해 등록금 부담을 반으로 줄여준다는 ‘반값 등록금’ 공약이 대표적이다. 여기엔 일자리 공약(4조5000억 원)의 1.5배에 이르는 7조 원이 들어간다. 혈세로 그만한 돈을 지출할 가치가 있는지를 냉정하게 셈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국민의 교육 기간이 1년 늘어나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0% 이상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로 접어들수록 숙련된 사람과 같이 일할 때 생산성이 더 높아지는 ‘인적자원의 외부효과’도 커진다. 미국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4년제 대졸자와 고교 졸업자의 소득 격차는 1980년대 33%에서 1990년대 중반 70%로 벌어졌다.
한국은 오히려 거꾸로다. 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인적자본 성장률은 1991년 0.96%에서 2011년 0.86%까지 하락했다”며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는 과잉 학력자가 진학 대신 생산 활동을 한다면 경제가 1.01%포인트 추가 성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구실을 못하는 ‘무늬만 대학’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소득 수준을 고려한 1인당 등록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다.
제 기능 못하는 대학이 등록금을 비싸게 받아도 학생들이 몰리는 시장 왜곡은 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를 도입해 대학 설립요건을 완화하고 대학 수와 입학 정원을 늘렸다. ‘돈만 있으면 대학 간다’는 말이 그때 나왔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학자금 융자 제도를 대폭 확대했다. 대학 문턱이 낮아지고 국가가 학자금까지 대주니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서는 ‘학력 거품’이 끼었다. 반면 양질의 일자리는 늘지 않아 대졸자 절반은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처지다.
일자리 창출과 대학 경쟁력 강화라는 근본 처방 없이 정부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반값 등록금으로 또 다른 거품을 만든다면 제 발등을 찍는 일이다. 전용덕 대구대 교수는 “재스민 혁명이 튀니지에서 촉발된 것은 많은 정치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지만 교육 버블도 그중의 한 요인”이라며 “대졸자가 실업을 비관해 자살한 직후 시위가 촉발된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고 풀이했다. 지난날 튀니지 정부는 사회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대학을 무료로 다니게 했다. 대졸자는 10년간 3배로 늘었고 대졸 실업률은 2010년 45%로 급증해 청년들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박철우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반값 등록금이 ‘반값 대학’을 낳을 판”이라고 우려한다. 정부가 등록금 인상을 억누르자 일부 대학이 졸업 이수학점을 줄이거나 외부 인턴십과 시간강사를 늘려 비용을 줄이고 있다는 얘기다. 교육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대학은 반값도 비싸다. 학습 의지, 학업 역량, 대학의 수준과 무관한 반값 등록금은 대학 진학의 초과수요를 만들어 부실 대학이 연명하도록 뒷돈을 대주는 것 같은 역효과를 낼 공산이 크다. 반값 등록금 운운하기 전에 밥값 못하는 대학이 어딘지 투명하게 공개해 시장에서 올바른 선택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야 반값 등록금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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