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를 보면 거의 그렇다. 주인공이 우연히 비급을 얻어 불세출의 무공을 연마한다. 악당들을 물리치고 약관의 나이에 천하제일에 오른다.
세상살이가 힘겨울 때마다 남자는 무협지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단 한 번의 행운으로 영웅이 되는 주인공을 통해 대리만족을 찾았던 것.
현실도 무협세계와 비슷해 보였다. 신공을 익혀 하늘을 날아다닐 수는 없지만 특별한 노하우만 확보할 수 있다면 순식간에 성공을 거둘 수 있으니 말이다. 인터넷 뉴스만 봐도 젊은 나이에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의 스토리가 넘쳐난다. 남자는 무협 주인공처럼 비급을 얻는 ‘기연(奇緣)’을 현실에서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꿈을 이뤄주기는커녕 확 깨주는 ‘책’을 만났다. 만화책이었다. 무협에서 접하지 못했던 현실 세계를 만화에서, 그것도 민낯으로 마주치게 되었으니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미생(未生)’이라는 만화에는 예상과 달리 영웅이 등장하지 않았다. 화려한 성공담 같은 것 역시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만화 주인공 장그래는 종합상사에 인턴으로 들어가 정사원이 되기 위해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간다. 하지만 간신히 얻은 자리는 계약직.
남자는 만화를 읽는 내내 불편했다. 정사원 중에도 시원시원 성공가도를 달리는 이는 없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될 정도로 일에만 매달리는 늦깎이 과장에서부터 회사 일과 아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워킹맘, 탁월한 능력 때문에 선배들로부터 은근히 견제를 당하는 여자동료 등.
익숙했던 무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이었다. 정의의 편에 서서 호쾌하게 승리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대단치도 않은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지질한 사람들이라니….
그러나 남자는 무협보다는 미생 쪽이 세상의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현실에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것이다.
누구나 바둑판에 두 집을 만들어 완생(完生)이 되기를 꿈꾼다. 미래를 보장받아 걱정 없이 살고 싶지만 현실에선 요원한 바람일 뿐이다.
항상 이기는 바둑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따지고 보면 무협 속 영웅마저 완생은 아니다. 지금은 천하제일에 올랐다지만 내일 일을 누가 알겠는가.
남자는 현실의 고수들이 왜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또한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약한 사람들은 두려움을 직시하지 않으며 피하려고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미생일 수밖에 없다’라는 운명을 받아들여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현실에서 단련할 수 있는 최상의 무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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