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두영]화학이 주도하는 화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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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6일 03시 00분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아니, 화학자들이 왜 철학자에게 상을 줍니까?”

최근 서울 도심의 한 호텔에서 열린 2012년 탄소문화상 시상식은 대한화학회 소속 화학자들의 ‘즐거운 항의’로 술렁였다. 박이문 전 연세대 특별초빙교수가 탄소문화상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제시하여 과학과 기술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개선하는 학술적 업적을 일궈 냈다는 게 선정 이유다. 이날 화학자들은 존경받는 원로 철학자에게 대한화학회가 대상(상금 5000만 원)을 수여했다는 즐거운 자부심으로 뿌듯했다.

탄소문화상. 거참, 이름부터 묘한 상이다. ‘탄소’라는 단어의 앞뒤에는 암호 같은 화학원소들이 붙어야 할 것 같은데, ‘문화’라는 이질적인 단어를 달고 있다. ‘탄소’ 하면 숯과 연필심과 다이아몬드 정도를 떠올리는 대중에게 ‘탄소문화’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다이아몬드 보기를 숯 보듯 하라’는 건가, ‘연필은 다이아몬드보다 강하다’는 건가. 게다가 ‘탄소문화상’이라니….

일산화탄소는 시커먼 연탄에서 나와 한때 많은 사람을 중독시켰던 ‘나쁜 가스’이고, 이산화탄소는 시커먼 공장 굴뚝에서 나와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처럼 느껴진다. 악취가 나는 유독성 액체인 이황화탄소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을 중독시켰고, 탄화수소의 일종인 벤조피렌은 담배 연기나 자동차 매연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발암물질이다.

그렇다 보니 그을음, 검댕, 숯, 연탄을 연상시키는 탄소는 검은 복면을 쓴 흉악한 범죄자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은 현상범을 쫓듯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까지 추적하는 상황이다. ‘탄소 제로 도시(Carbon Zero City)’는 과연 ‘범죄 없는 마을’처럼 평화로운 곳일까? 어쩌다가 탄소가 이렇듯 시커먼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을까?

탄소는 생명의 근원이다. 탄소는 생명의 질료(質料) 가운데 하나로, 유전정보를 담은 DNA도 따지고 보면 탄소화합물이다. 호흡과 광합성 같은 생명 현상도 탄소를 기반으로 한다. 이런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태양의 에너지도 탄소를 촉매로 하는 핵융합 반응으로 생산된다. 인류는 불을 피우면서 본격적으로 탄소를 소비하기 시작했고, 농경과 목축을 통해 탄소를 생산했으며, 산업혁명을 통해 탄소를 에너지로 바꾸었다. 심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정신도 탄소화합물로 작동하는 뇌의 활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날 시상식에서 대한화학회 이덕환 회장은 최근 탄소가 그 성과와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발달한 탄소문명(Carbon Civilization)에 걸맞은 합리적이고 새로운 탄소문화(Carbon Culture)를 창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자리에 김시중 채영복 김명자 전 장관 같은 원로 화학자들이 여럿 참석하여 회장의 발언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탄소는 화합(化合)의 특성이 가장 강한 원소다.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듯, 둘 이상이 결합하여 본래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특성이다. 탄소화합물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과 인공적으로 합성한 것을 합치면 거의 1000만 가지에 이른다. 다른 모든 원소가 만든 화합물을 더한 것보다 훨씬 많다.

탄소가 화합물을 잘 만드는 이유는 우주에서 수소, 헬륨, 산소 다음으로 풍부한 데다 공유결합을 할 수 있는 전자를 4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특성 덕분에 ‘탄소’가 ‘문화’와 결합할 수 있는 것일까? 시상식에서 화학과 철학의 공유결합은 성공적이었을까? 탄소가 화합물(化合物)을 잘 만든다면, 탄소문화는 화합물(和合物)을 잘 만들 수 있을까?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huhh20@donga.com
#화학#철학자#화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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