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구성을 두고 하마평이 무성한 와중에 불현듯 오렌지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륀지다.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지금처럼 교육 분야를 담당하던 기자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오렌지를 보면 괜히 민망하다. 인수위원장으로 깜짝 발탁된 이경숙 당시 숙명여대 총장은 2008년 1월 새 정부의 영어 교육 방향을 설명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더라. 아륀지라고 하니까 알아듣더라”라고.
MB 정부의 영어 공교육 강화 의지가 한순간에 영어에 대한 열등감과 집착증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영어 공교육을 실용과 회화 위주로 강화하겠다는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아륀지 발언은 시작도 못한 정권의 모습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인수위의 구상일 뿐인데도 즉각적으로 사교육 시장이 출렁거렸다. 마침 겨울방학이었던지라 거리마다 ‘방학 집중 영어 몰입교육’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학원 차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은 “이제 영어 회화가 고입, 대학까지 좌우하게 됐다”라면서 원어민 강사 수소문에 나섰다.
당장 영유아 자녀를 둔 엄마들마저 불안해하며 영어 사교육에 몰두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특히 입시 준비에 바쁜 중고생보다는 초등학생 학부모가 다급했다. ‘2008년 사교육비 통계’를 보면 아륀지의 영향이 극명히 드러난다. 영어 사교육을 받는 초등학생은 2007년 60.7%에서 2008년 62.7%로 늘었다. 2008년은 초등학생이 전년 대비 16만 명 가까이 줄어든 해였는데도, 영어 사교육을 받기 시작했다는 초등학생은 8만 명 가까이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영어 사교육비도 초중고교별로 1인당 8∼16%씩 뛰었다. 사교육비 증가로 비판을 받던 교육과학기술부 공무원마저 “새 정부의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이 영어 사교육비를 올렸다”라고 해명할 정도였다.
당시 인수위에서는 국가영어능력시험을 신설하는 방안, 이를 1년에 4번 치러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외국어 영역을 대체하는 방안, 대학 입시를 자율화하는 방안 등 구체적인 교육 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구상을 내놓을 때마다 사교육 시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학부모들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 대신 불안감에 휩싸였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 선거 공약이나 정권 교체 시기마다 새로운 교육 정책이 줄줄이 나왔다. 이 중 상당수는 과연 학교 현장을 아는 사람이 만들었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내용이다. 아륀지 발언도 여기에 속한다.
이처럼 교육 정책이 단골로 써먹히는 이유는 경제나 외교안보 분야에 비해 선전 효과는 크면서도 실행 비용은 적게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5년 전 인수위에서 교육 분야를 담당했던 당직자는 “이게(교육 공약) 참 희한하다. 독이 든 사과 같다”라는 표현을 썼다.
교육이 권력자에게 얼마나 매력 있는 분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다른 분야의 정책 구상은 당장 민간과 시장을 뒤흔들지 않지만, 교육 분야의 정책 구상은 즉각적으로 사교육 시장을 들었다 놨다 한다는 점은 알 것 같다.
이번 인수위가 설익은 교육 공약을 터뜨릴까 미리 경계하게 되는 이유다. 아륀지가 MB 정부 5년을 희화화한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면 이번 인수위도 새로운 교육 정책에 탐을 내면 곤란하다. 현재진행형인 교육 정책을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검토하고 보완하는 것이 인수위가 새 정부를 위해 할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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