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연말 학급회의 단골 주제는 ‘마무리를 잘하자’였다. 총선과 대선을 치른 올해 정치권, 특히 야권의 마무리는 ‘노무현정신’을 박물관에 보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유통기간도, 유효기간도 끝난 지 한참 됐기 때문이다.
28일 민주통합당 새 원내대표로 박기춘 의원이 뽑힌 것은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또 한번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친노는 인정하지 않을 태세다. 대선 패배 뒤 총선 패배 때와 똑같이 “모두의 책임”이라고 외치더니 원내대표 선거 때도 똘똘 뭉쳐 친노 쪽 사람을 밀었다. 대권이 안 되면 당권이라도 꽉 잡겠다는 패권주의다.
노무현 정부 때가 유토피아였다던 그들의 유세를 떠올려 보면 이번 대선 결과는 문재인 후보 말마따나 “역사가 거꾸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문재인은 패배 뒤 연거푸 “세 번째 민주정부를 만들지 못했다”고 역사의 죄인을 자처하더니 어제는 “비대위가 출범하면 힘을 보태겠다”고 재등장을 예고했다. 자신들만이 성공한 민주정부라고 믿거나 아직도 세상을 민주 대 반(反)민주로 보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런 왜곡된 인식이 시대가 바뀌어도 절대 안 바뀐다는 데 있다. 진보적 학자인 최장집은 2007년 일찌감치 “노 정부는 무능과 비(非)개혁 때문에 실패한 정부”라며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정권을 넘길 수밖에 없다”고 예견했다. 원로 정치학자인 김호진도 2008년 ‘실패한 국가경영자’로 노무현을 규정했다. 만일 노무현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폐족(廢族)”이라며 자숙 모드를 보였던 친노가 지금처럼 부활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거칠게 말한다면 친노가 멋대로 만들어 떠받든 노무현정신 때문에 새로운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민주당이 또 한번 망한 형국이다.
“선거는 선수끼리 국민 속이기”
5년 전 대선 패배 뒤 민주당에 변화의 움직임은 있었다. 포용적 성장과 일자리정책으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며 2009년 5월 17일 첫선을 보인 ‘뉴 민주당 플랜’이다. 그러나 엿새 만에 터진 노무현의 자살과 함께 민주당의 새 비전은 타살되고 말았다. 고인에게는 너무나 관대해지는 우리 국민의 심성을 그들은 친노에 대한 전폭 지지로 해석했고, 노무현정신을 외치며 좌클릭을 거듭했다. 그 결과가 결국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에서의 연패다.
지금이야 “계파가 어디 있느냐”고 우기고 있지만 친노는 노무현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실 여부, 그리고 실현 가능성과 상관없이 가장 숭고한 정신 말하기 경쟁을 벌였던 사람들이다. 마르크스도 “난 마르크스주의자 아니다”라고 했다지만 노무현이 살아있다면 과연 노무현정신의 소유권을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들은 글로벌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며 사회가 시장을 통제하는 경제체제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다. 사실과도, 세계적 흐름과도 다른 얘기다. 균형감각 있는 정치학자로 알려진 윤평중조차 2010년 이미 “유럽의 진보도 성장과 일자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낭비적 복지정책을 제어하는 방향인데 분배 위주, 복지 위주 민주당의 좌회전은 세계적 맥락에서 이례적”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 했다는 노 정부의 선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진보적 정치학자인 손호철은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전투적 언행으로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국민 분열을 가속화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내게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언행은 “선거라는 게, 선수들끼리는 잘 알지만 본질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게임”이라고 한 2006년 2월의 발언이다. 아무리 정치가 권력을 잡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지지 세력을 위한 정책을 내놓는 것이라 해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국민을 속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나마 노무현은 청와대에 들어간 다음 천기를 누설했지만 친노는 그만큼의 인내심도 갖추지 못했다. 제대로 속이는 법도 못 배우고 ‘꼼수’만 늘었으니 한참 하수(下手)다. 여기에 그들이 통합진보당을 향해 비판했던 종북(從北) 성향과 패권주의, 여당을 향해 공격했던 불통과 불신의 정신까지 더해 갈수록 기세등등해졌다.
정직하게 사민주의로 진보하라
3년 전 ‘뉴 민주당 플랜’을 만들었던 김효석 전 의원은 “모든 것을 이념적으로 접근해 전부 왼쪽이 맞다고 한다면 가장 잘하고 있는 정당이 민노당(현재 통진당)”이라고 했다.
그들같이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의 재벌 해체와 보편적 복지를 계속 주장할 작정이라면 민주당은, 또는 친노는 최근 ‘사회민주주의 선언’을 발표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조원희 정승일처럼 당당하게 사회민주주의를 내걸기 바란다. 아니면 자신들만이 민주이고 역사적 흐름이라며 국민을 속이는 꼼수는 집어치워야 한다.
노무현에 대한 존경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맛을 또 보겠다고 노무현정신만 팔아대는 건 고인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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