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장강명]인수위원들의 ‘외상값’

  • Array
  • 입력 2012년 12월 31일 03시 00분


코멘트
관가에 떠도는 농담 중에 ‘외상 떼먹고 달아나기 가장 좋은 기관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라는 말이 있다. 청와대 근처 술집에서는 한때 “우리 인수위에서 나왔는데…”라는 말로 외상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던 모양이다. 인수위는 한시 조직이다. 몇 달 뒤 조직이 해체돼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술집 주인은 외상값을 어디 가서 받아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얘기다. 우스개로 만들어 낸 말일지 모르지만 대통령직인수위가 막강한 힘을 지녔으면서도 별 책임은 지지 않는 조직이라는 한 조각 진실이 담겨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에는 이경숙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말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어륀지’라고 해야 알아듣는다”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인수위가 “위원회의 공식 견해가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났고, 그 뒤로 외래어 표기법이 바뀐 것도 아니니 그냥 설화(舌禍)로 마무리됐다. 그즈음 새우깡에서 쥐 머리가 나오는 식품위생 사고가 일어나자 “인수위원장이 ‘어린쥐’ 타령을 하니까 진짜 ‘어린 쥐’가 나타났나 보다”라는 비아냥거림이 생겼다.

▷이 위원장으로서는 영어 단어 발음 한번 했다가 너무 호되게 당하는 것 같은 억울함이 있겠지만 뒤집어 보면 점령군 흉내를 내는 사람들과 설익은 정책 구상이 빚은 해프닝이다. 몇 달 뒤 벌어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 사태의 싹이 이때부터 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인수위에 이래저래 가담했던 사람들이 ‘최다 표차 당선’이라는 대선 결과를 뭘 해도 좋다는 백지위임장으로 착각하고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민심의 반감을 키웠던 것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87년 대통령직선제 재도입 이후 처음으로 과반 득표,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안티 세력’과 함께 새 정부를 출범하게 될 것 같다. 분위기로 봐서는 집권 초 언론·야당과 허니문도 기대하기 어렵다. 인수위가 이제 막 출발했는데 벌써부터 ‘밀봉 인사’ 논란이 나온다. 정부조직 개편이 제대로 논의도 되지 않았는데 해양수산부를 어디에 두느냐로 말이 엇갈리는 모습이 보인다. 정작 새 정부의 국정 기조와 철학은 아직 안갯속이다. 첫 단추부터 잘 끼워야 할 텐데….

장강명 산업부 기자 tesomiom@donga.com
#인수위원#외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