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레알 ‘타워’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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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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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난 108층 주상복합건물 스카이타워의 철근이 녹아내린다. 건물이 벌써 한쪽으로 기울어 바로 옆 쌍둥이 건물을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건물을 폭파시켜 주저앉히는 길뿐이다. 그러나 극한상황 속에서 뜻대로 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폭파 장치를 설치하던 소방대장 강영기(설경구)가 사람을 구조하다가 폭파 장치 리모컨(자동제어 장치)을 잃어버린다. 그는 후배 대원을 포함한 사람들을 탈출구로 내보낸 뒤 셔터를 내린다. 수동으로 기폭 장치를 누르고 자신은 산화하려는 것이다. 울부짖는 후배 대원을 향해 그가 말한다. “난 자네를 구하려는 게 아니야. 자네가 앞으로 구할 사람들을 구하려는 거야.”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명대사다.

▷영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강영기 같은 소방관이 있었다. 경기 일산소방서 장항 119안전센터 소속 김형성 소방장(43). 지난해 12월 31일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구산동 PVC물류창고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후배 소방관 두 명을 내보내고 홀로 진압을 하다 창고 건물이 무너져 사망했다. 20년차 베테랑이었던 그는 위급한 상황을 직감하고 아직 경험이 부족한 후배들의 등을 떠밀어내 살려냈다. 풍부한 현장 경험과 투철한 책임감이 없으면 못할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소방관처럼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서 있는 직종도 흔치 않다. ‘타워’를 만든 김지훈 감독도 “그들은(소방관) 모두가 도망 나오는 곳에 들어가고, 평균수명도 가장 짧은 직종이다”라고 말했다. 군인의 사망률도 소방관처럼은 높지 않다. 국내에선 연평균 6.9명의 소방관이 화재나 구조현장에서 사망한다. 부상자는 매년 340여 명. 김 소방장이 구해낸 후배 소방관 두 명도 2도 화상을 입었다. 부상의 고통도 죽음 못지않다. 신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겪는다. 끔찍한 화재 현장을 목격한 소방관 상당수는 환청과 악몽에 시달린다.

▷많은 소방관의 책상에는 스모키 린이라는 미국 소방관이 쓴 ‘소방관의 기도’가 붙어 있다.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는 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중략) 신이시여 내 형제가 추락하거든 내가 곁에 있게 하소서.’ 이기적 속성을 가진 인간이 숭고한 일을 하도록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돈이나 명예를 원한다면 소방관은 적합하지 않다. ‘영웅’ 대접을 받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 소방관은 처우도 엉망이고 툭하면 비난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방관들은 오늘도 묵묵히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출동한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레알 소방관’ 고 김형성 소방장의 명복을 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타워#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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