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고 오늘날까지도 세력이 막강한 ‘소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오로지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재미’에 있다.
소설의 재미는 나와 비슷한, 바로 나일 수도 있는 작중 인물들이 고문당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다. 적대적인 여건들 때문에 맺어지지 못하는 연인, 친구를 배반해야만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소시민, 자식에게 오해를 받고 가슴앓이 끝에 외롭게 죽어 가는 부모, 기타 인간이 대면할 수 있는 온갖 고난에 몸부림치는 주인공들이 독자의 ‘재미’를 위해 진열된다. 작가는 자기의 작중 인물들에게 냉혹하고 모질지 않으면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마음 아픈 공감은 소설을 읽는 재미의 시작일 뿐이다. 독자는 작중 인물들이 그들의 시련에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인간을 압박하는 무수한 요인을 인식하고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터득한다. 이는 소설에서만 얻을 수 있는 거대한 희열이다. 적어도 인간을 소설만큼 생생하게, 소설만큼 강렬하게, 소설만큼 세밀하게 드러내 주는 매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인간의 타인에 대한 관심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일층 높아졌다. 유럽도 200∼300년 전까지는 거의 다 농경사회여서 사람들이 대대로 같은 마을 사람들과 일생을 같이 살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부(富)의 팽창과 함께 새로운 직업이 창조되고 이동성이 증가해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생활 방식도 농촌의 개방적 방식에서 핵가족 단위의 독립적, 폐쇄적 방식이 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다.
또 태생으로 결정되던 인간의 삶에 자신의 진로,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면서, 다른 사람은 어떤 이유로 어떤 선택을 하고 그 결과로 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알고 싶어졌다. 하늘이 준 분복대로 사는 것이 아닌, 새로이 운명의 주체로 부상하는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외적인 조건과 내적인 동기를 해부해 보여 주는 소설은 교양과 학습, 오락의 삼박자를 갖춘 새 시대의 총아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 상황, 요구에 부응해서 탄생한 근대적 의미의 소설(novel)은 예전의 단순하게 자극적인 이야기인 설화문학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소설은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만한(즉, 개연성이 강한) 사건 또는 상황의 발생으로 시작해 인과 관계에 따라 진전되고 완결된다. 또 소설의 주인공은 무결함의 이상형이 아니고 나와 같이 이상도 목표도 있지만 결함과 약점도 지닌 보통 사람이다. 소설을 구매하는 독자는 그 인물의 내면에 자신을 대입해 그의 선택과 운명을 마음 졸이며 따라가는 고통스러운 희열을 구매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매우 구체적인 현실의 제약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간다. 따라서 소설은 막연한 시대와 막연한 지역을 배경으로 펼쳐질 수가 없다. 배경이 6·25전쟁 이전인지 이후인지 모호한 한국소설을 누가 읽겠는가. 1960년대 소설과 1980년대 소설 속의 폭력남편에게 대응하는 아내의 의식과 행동은 천지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감각이 생기고 역사의식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행동 동기를 면밀히 분석해 보여 주어서 독자 자신의 내면 성찰을 돕고 자신을 더 잘 파악하게 해 준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우리 내면의 어두운 곳에 탐조등을 비추는 과정이면서 자신을 재판에 회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은 인간을 바꿀 수 있다.
영국에서 18∼20세기는 오늘날 서구를 만든 근대화의 긴 과정, 그리고 근대화의 부작용에 대응하는 기나긴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근대 영국소설을 읽으면 서구의 사상과 문물이 지배하는 현대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화에 수반되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도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영문학 사상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패멀라’는 18세기 영국에서 새로이 부상한, 청교도들이 주축이었던 신흥 중산계급이 도덕적으로 전통 귀족계급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씌어졌다. 중산층 독자들은 열렬히 환호했고 전통 상류계급은 분노해서 반격했다. 아직 소설의 형식이 확립되지 않았던 18세기 영국은 다양한 종류의 흥미로운 시도가 이루어진 소설의 황금기였다.
산업혁명의 격랑 속에서 노동계층의 비참상이 극심했고 금전만능주의와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고갈되어 가던 19세기에 영국인들은 소설이 고갈된 인간성을 회복해 주기를 바랐다. 작가들은 이 여망에 부응해서 소설을 통해 동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고취하고 인간의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크나 큰 사명감을 갖고 대작 장편들을 써냈다.
19세기에 극렬해진 식민지 경쟁이 결국 양차(兩次) 세계대전을 부른 20세기에 서구는 정신의 총체적 혼돈 속에서 방황했고 문학도 그 혼돈과 방황을 그대로 담았다. 자기가 속한 사회와 유대감을 느낄 수 없고 인간 소외가 실존의 조건이 된 우리 시대의 소설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를 거부하지만 우리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직시하는 데 지대한 도움을 준다. 이처럼 소설은 시대마다 동시대인들의 가장 절실한 관심사를 다루면서 인간의식의 지평을 넓히고 내면을 풍부하게 했다. :: 필자는 ::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 웨스트조지아대에서 문학석사, 뉴욕주립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 첫 학기 ‘빅토리아조 영국의 문학과 사상’을 수강하면서 산업혁명의 부작용으로 극심한 몸살을 앓았던 19세기 영국 상황이 급속한 산업화를 겪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 흡사해 학위 논문 주제를 ‘근대 영국 산문’으로 바꾸었다. 한국문학작품의 영역(英譯)에 열정을 쏟았으며 영자신문, 국내 일간지 등에 40년 가까이 시사, 문화 칼럼을 기고했다. 런던대에서 1년간 한국문학을 강의했으며 고려대 도서관장, 한국연구재단 주관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운영위원장 등을 지냈다. 새해부터 연재하는 ‘소설 속 인생’을 통해 정치사회적으로 요동쳤던 19세기 영국인들이 갈망했던 따뜻한 삶의 온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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