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캘리포니아 주)는 사랑스러운 도시다. 아직 못 가봤다면 꼭 한 번 찾을 일이다. 가끔 교통체증으로 옴짝달싹 못할 때면 나는 이 도시를 떠올린다. 기억 속 그 모습이 답답함과 조급증을 달래 줘서다. 1996년 5월이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던 맑게 갠 하늘의 한가로운 일요일이었다. 차는 골든게이트브리지 위로 달렸고 라디오에서는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나는 내 마음을 샌프란시코에 두고 떠났다네)’로 시작되는 토니 베넷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때 차창 밖에 펼쳐지던 샌프란시스코 만의 바다와 하늘, 그 다리 위에서 조깅하던 모습…. 16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한가로움과 평화로움은 늘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이 샌프란시스코를 나는 ‘케이블의 도시(City of Cable)’라고 부른다. 케이블은 쇠로 만든 밧줄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를 보자. 골든게이트 브리지, 케이블카, 언덕, 미식축구팀, 주민 8만 명의 거대한 차이나타운…. 여기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금(金)이다. 19세기 후반 전 세계를 들끓게 한 ‘골드러시(Gold Rush)’다. 때는 1848년 1월. 샌프란시스코 외곽 아메리카 강변의 한 제재소 공사 현장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사금이 발견된 것이다. 이 소식은 전광석화처럼 번졌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는 노다지를 찾으러 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2500명뿐이던 주민이 6개월 만에 그 열 배로 늘었을 정도다.
미국 대통령도 그해 12월 금 발견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자 전 세계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중국 광둥 성에서만 4000명―이들이 차이나타운의 개척자다―, 호주에선 무려 1만 명이 태평양을 건넜다. 이게 공식적으로 1849년 시작된 샌프란시스코 골드러시로 1859년까지 11년이나 지속됐다. 스코틀랜드인 앤드루 핼리디(1836∼1900)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852년 열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서 건너왔다. 그의 아버지는 1835년 케이블을 발명한 주인공. 케이블은 샌프란시스코 골드러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동안 포기해야 했던 깊은 땅속의 금맥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게 해서다. 또 건너지 못했던 강을 쉽게 건너게 해준 것도 케이블(현수교)이었다. 그러니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케이블로 사업을 일군 건 당연지사. 그는 현수교 건설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그런 골드러시의 유산 중 가장 극적인 것은 골든게이트브리지다. 1200m가 넘는 광대한 만(灣) 입구를 연결한 다리가 케이블로 지탱되는 현수교여서다.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개통 140년의 케이블카도 마찬가지다. 샌프란시스코를 관광도시로 변모시킨 이 불세출의 명품전차는 지중매설 케이블로 이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덕분에 양몰이 외엔 별 쓸모 없던 40여 개 언덕이 부호들이 선호하는 기막힌 전망의 부촌으로 바뀌었다.
‘49’도 샌프란시스코에선 의미심장한 숫자다. 이게 골드러시의 ‘1849년’에서 온 것은 물론이다. 미식축구팀은 ‘포티나이너스(49ers)’, 골드러시 현장을 아우르는 관광도로는 ‘SR49’(SR는 캘리포니아 주 도로)다. ‘골드’도 마찬가지여서 축구팀의 치어리더 팀은 ‘골드러시’, 최초 금 발견지역은 골드카운티, 캘리포니아 주의 별명은 ‘골든 스테이트’다.
골드러시는 여러 사람을 울리고 웃겼다. 첫 금 발견 현장에 있었던 새뮤얼 브래넌은 재빨리 삽과 곡괭이를 매점매석해 골드러시 최초의 백만장자로 기록됐다. 텐트업자 리바이 스트로스는 색깔을 파랗게 잘못 염색해 퇴짜 맞은 군납텐트로 세상에서 가장 질긴 바지(블루진)를 만들어 노다지꾼에게 팔아 돈벼락을 맞았다. 하지만 최초로 금이 발견된 현장에 제재소를 지은 이는 30년 후 알거지가 됐다.
기회는 늘 주어진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그 점에서 샌프란시스코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리바이 스트로스의 블루진과 같은 기막힌 역전까지. 이게 새해 아침 샌프란시스코를 기억하게 하는 이유다. 모두에게 이 한 해가 기회와 반전의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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