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거리는 태양과 야자수의 나라 코스타리카. 1년 내내 꽃이 피고 커피농장과 화산온천으로 유명한 관광 천국이다. 아름다운 해변과 열대 우림(雨林)이 가득한 이곳으로 이달 1일 한국 국회의원 5명이 ‘예산심사 시스템’을 연구하겠다며 출장을 떠났다.
코스타리카는 4년 전에도 국회의원들이 ‘예산 제도 연구’를 명목으로 출장을 다녀온 곳이다. 중남미의 작은 나라가 얼마나 예산 시스템이 훌륭하기에 4년마다 한 번씩 출장을 갈까. 코스타리카뿐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의원 외교’ 등을 내세우며 단골로 출장 가는 페루 이집트 체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는 유명 관광지가 많다. 이게 우연인가.
19대 국회도 예외가 아니다. 예산안이 본회의를 통과하자마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의원 9명은 외유(外遊)성 해외 출장을 떠났다. 국민 세금을 사용하는 출장인데도 자세한 일정이나 예산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른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의원연금과 면책·불체포 특권을 비롯해 각종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앞다퉈 다짐했다. ‘무노동 무임금’을 실천하겠다며 작년 6월 새누리당 의원 147명이 세비 한 달분을 반납할 때는 자못 비장했다.
선거가 끝나자 이 모든 약속은 아련한 추억이 됐다. 여야 의원들은 해를 넘겨 예산안을 늑장 처리하면서도 의원연금 예산 128억 원은 살려냈다. 일주일만 국회의원을 해도 평생 다달이 120만 원을 받게 되는 의원연금은 다른 나라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권 중의 특권이다. 지역구 민원을 챙기는 ‘쪽지 예산’도 여전했다. 의원들은 속기록도 남기지 않고 여의도 호텔방에서 ‘밀실 담합’을 통해 4500여 건의 지역구 민원을 예산에 반영했다. 그러느라 저소득층 지원 예산과 국방비를 깎아버렸다.
정치권이 약속한 정치개혁안 중에 지켜진 게 별로 없다. 세비 30% 삭감안은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잠자고 있다. 국회의원을 하면서 변호사 교수 기업체 대표를 겸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원 겸직 금지’도 새 정부 조각(組閣)을 앞두고 쏙 들어가 버렸다. ‘묻지 마 폭로’와 ‘비리 의원 엄호’ 수단으로 변질된 면책·불체포 특권은 헌법 개정 사항이라는 이유로 논의조차 안 하고 있다.
여론의 비난이 빗발치자 정치권은 엊그제 다시 정치쇄신특위를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예결특위를 상설화하고 속기록을 꼭 남기도록 하겠다는 대안을 내놨다. 이런 방안들은 몇 년 전에도 나왔지만 선거가 끝나면 흐지부지되곤 했다. 국회의원들의 ‘거짓 쇼’에 속지 않으려면 유권자와 언론이 눈을 똑바로 뜨고 감시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래야만 국회의원들의 건망증을 고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