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옳은 말만 하는 경직된 사람보다는 슬쩍 잘못을 덮어줄 줄 아는 온화한 사람에게 끌리지 않나요? 좋은 물건으로 넘치는 집보다는 있어야 할 것 외엔 아무것도 없이 정갈하게 정돈된 방이 편합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인 초라한 밥상을 부끄럼 없이, 차별도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몸에서, 방에서, 물건에서 그런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가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네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대박입니다. 사는 건 힘겨운 전쟁, 세상엔 자비가 없다는 팡틴의 노래에서는 눈물이 나네요. 영화를 보고 나니 영화보다도 ‘레미제라블’을 읽고 며칠 동안 책 생각만 했던 20대 때 그때의 감동이 깨어납니다. 영화에서는 잠깐이지만 원작에서 빅토르 위고는 미리엘 신부와 장 발장의 만남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삶의 모든 일이 표지라면 장 발장이 미리엘 신부를 만난 것은 변화의 예감이지요? 억울하게 당해야 했고 견뎌야만 했던 긴긴 인욕의 세월이 묵은 만큼 아픈 만큼 빛으로, 사랑으로 변하는 계기였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내 꿈이 내가 가꾼 화단이 있는 집에서 대문 걸어놓지 않고 사는 것이었던 것도 미리엘 신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그랬으니까요. 나는 귀족이 와도, 걸인이 와도, 언제나 한결같이 검소한 식탁을 흔연하게 나누는 그가 참 좋았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의 힘을 알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거친 빵과 따뜻한 수프도 신이 차려주신 훈훈한 밥상이 됩니다.
그의 유일한 사치는 손님이 올 때나 내는 은식기와 은촛대지요? 그는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차별이 없이 그의 식탁으로 흘러들어온 인생을 기꺼이 대접합니다. 그의 은식기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자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촛대를 쓰는 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촛대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태우며 작은 빛을 내는 촛불의 집입니다. 잘 닦인 은촛대는 정화의 힘을 아는 정갈한 자를 증거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 신성한 식탁에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암담한 죄수 장 발장이 앉게 된 것입니다. 모두들 위험하다고 경계하라고 하는데 신부만 괜찮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집은 고통받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며 재워주기까지 합니다. 위험하다고 한 사람의 예감대로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잡혀 옵니다.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는데, 신부만 준 거라고, 선물이라고 하지요? 은촛대도 줬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되묻습니다. 그의 능청에 경찰도 의혹을 풀어버립니다.
어떤 이는 사랑도 숨 막히는 집착으로 바꾸지요?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도 의혹으로 바꿉니다. 그런데 미리엘은 의혹을 평상심으로 바꾸고, 도둑질도 자비로, 사랑으로 바꿉니다. 위악적일 수밖에 없었던 장 발장이 위악의 가면을 벗고 말갛게, 괜찮은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괜찮은 사람 미리엘 때문입니다. 미리엘은 긴긴 부조리의 세월을 마르지 않은 사랑의 에너지로 바꿔주는 마법사였습니다.
19년의 부조리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된 큰사람에겐 거칠 게 없습니다. 미리엘을 만나 전환점을 맞으며 장 발장은 우뚝 성장하고 고독 속에서도 빛이 나, 조용한 사랑, 깊은 사랑, 큰 사랑을 할 줄 아는 진정한 사내가 된 것입니다. 그렇듯 사랑은 사랑으로 흐릅니다.
따스한 사랑의 온기에 삶이 바뀐 적이 있으신지요? 억울해서 소화가 되지 않고 명치끝에 걸려 있기만 했던 버림받은 시간들이 그 온기로 인해 진실하고 다부진 에너지로 전환될 때 비로소 우린 ‘존재 이유’를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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