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대 시절, 겨울방학 뒤 의례적으로 진행되던 문답식 학습경연이라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대학 내 14개 학부가 3일 동안 수업도 안 하고 강당에 모여 월드컵처럼 토너먼트를 치러 승자를 가린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각 학부는 다시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부터 학생들을 지방에서 불러올려 밤새 모범답안을 외우게 한다. 정식 경쟁이 시작되면 제비뽑기로 선택된 ‘운 없는’ 학생들이 연단에서 수천 개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땀을 빼며 상대가 낸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대답을 잘못한 학생은 ‘미제’보다 더 큰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살벌한 사상투쟁회의 대상이 되고, 졸업할 때까지 찍혀버린다. 하긴 그 학생 때문에 학급 소대장부터 학부 당비서까지 수십 명이 줄줄이 연좌제로 비판무대에 서야 한다.
문답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제 중 하나가 신년사 관련이었다. 살기 위해선 지난해 성과와 올해의 각종 과제를 열거한 신년사 분량보다 결코 적지 않은 답안을 줄줄 외워야 했다.
그렇게 혹독하게 신년사 공부를 하고 나니 6년 뒤 대학을 졸업할 때쯤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돼 한 가지 깨달음은 얻었다.
“신년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헛소리다”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신년사 내용대로라면 북한은 오래전에 선진국이 돼 있어야 한다. 과장되고 거창한 문장과 추상적인 목표 제시로 가득 찬 신년사 정도는 나도 하루면 쓸 자신이 있다.
올해는 김정은이 직접 신년사를 낭독해서인지 주민들에게 한 달 기간을 주고 이를 몽땅 외울 것을 요구한다고 한다. 내가 일찍 탈북한 것이 참 다행스럽다.
남쪽에도 북한 신년사가 발표되면 단어 사용 빈도까지 따지며 열심히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심지어 수십 쪽짜리 보고서도 있다. 그런데 신년사와 현실은 어떤가.
2010년 북한 신년공동사설에는 “북남관계 개선의 길을 열어야 한다.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적극 실현해야 한다. 민족공동의 이익을 첫 자리에 놓고 화해를 도모하며 협력사업을 추동해야 한다”는 온갖 좋은 말이 다 있었다. 이를 보고 남쪽의 박사 8명이 “남북관계의 개선과 경제협력의 증진을 위한 의지를 강하게 표명함. 매우 유화적인 대남태도를 보임”이라는 공동 분석보고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 순간 서해 어디쯤에선 북한 특공조가 잠수함 공격 맹훈련을 벌이고 있었다. 불과 석 달도 안 돼 천안함이 공격당했고 연말엔 연평도 포격으로 한반도가 전쟁 직전까지 갔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2006년에도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대결구도나 관망보다는 실용적인 접근태도를 견지할 것으로 전망됨”이란 공동사설 분석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올해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2013년을 ‘사회주의강성국가 건설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갈 거창한 창조와 변혁의 해’라고 규정했다. 이런, 신년사마저 꼭 빼닮은 3대 세습이라니. 그러니 오래전에 내가 얻은 깨달음도 여전히 유효할 것 같다. 그냥 안들은 셈 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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