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으로 배달된 고교 동창회보를 넘기다가 남편이 깜짝 놀라며 얘기했다. “우리 학교가 서울대를 한 명밖에 못 가? 진짜야?” 남편의 손끝은 ‘3학년 ○○○ 군, 서울대 합격’이라는 제목을 가리켰다.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답게 정관계 고위직의 이름이 흘러넘치는 동창회보에 실린 기사였기에 좀 뜬금없기는 했다. 서울대를 한 해에 100명씩 갔었다는 학교다.
하지만 교육 담당 기자인 내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쿨(?)했다. “작년에는 한 명도 못 갔는데. 그 정도면 잘한 거야.”
나름 광역시에 있는 일반계고의 현주소가 이렇다. 서울대 합격자가 고교의 척도는 아니지만 학생들의 최대 목표가 대학 진학인 일반계고에서 이만큼 분명한 지표도 없다.
고교의 문턱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특목고나 자율고로, 일찌감치 진로를 정한 아이들은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로 빠진다. 일반계고에는 이도 저도 아니라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대학 문턱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위권 대학은 특목고생을 붙들려 꼼수를 쓰고, 시골 고교는 지역균형선발 같은 배려라도 받건만…. 평범한 일반계고는 급속도로 진행된 고교 다양화 정책 속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요즘 만난 일반계고 교사들은 스스로를 ‘쭉정이고’ ‘민무늬고’ ‘알몸고’ 교사라고 부른다. 학생들을 좀 다잡으려 하면 “내가 여기 오고 싶어 온 줄 아세요?”라며 반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절대 다수인 일반계고가 고교 중의 을(乙)이 돼버렸다는 설명이었다.
대학과의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상위권 대학 주도로 매년 바뀌는 입시요강을 따라가느라 고교는 가랑이가 찢어진다. 특목고에 유리한 전형이 나오면 일반계고는 속수무책 들러리가 된다. 대학과 고교가 병렬이 아닌 수직 관계가 된 지 오래다.
혹시 이런 현실을 알아서였을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내건 공약 중 하나가 대입 전형 단순화다. 대입 전형이 수천 가지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던 점을 감안하면 가장 반겨야 할 곳은 일선 고교일 터이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일반계고 교사들은 되레 걱정이 늘었다. 이들은 “대학에도 을, 고교에서도 을 신세인 우리가 변화를 따라가려면 3, 4년씩 걸린다. 그나마 적응 좀 했다 싶은데 또 바꾼다니…”라고 한탄을 한다.
일례로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비판이야 어떻든 간에 일반고는 이제야 좀 대비 태세를 갖췄다고 한다. 창의체험 수업도 늘리고, 동아리도 만들고, 진로지도 교사도 일부 확보했다. 서울의 A일반계고 교감은 “시행착오 끝에 입학사정관이든, 논술이든, 특별전형이든 간신히 따라잡을 만해졌다. 이걸 없애면 또 닭 쫓던 개 꼴이 된다”고 했다.
일반계고 교사들은 교실에 한번 와보지도 않은 학자들이 교육학 원론을 펴는 게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전형 단순화가 아니라 현장 안정이 더 급하다는 호소다. “일반계고가 어느 정도 뒤따라오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으면 을의 몰락을 막을 수 없다. 경제에서만 중산층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새내기 교사의 말이 절절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