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표께서는 만약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현재 어떤 위치에 계실거라 생각하십니까?"
2007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마련한 간담회. 여러 기자들과 저녁식사를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그런데 필자가 위에 소개한 질문을 하자 박 전 대표는 약간 표정이 굳었고 "글쎄요"라면서 화제를 돌렸다.
사실 필자는 가볍고 재치있는 대답을 예상했고, 그러면 바로 진짜 묻고 싶었던 질문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차가운 반응을 보임에 따라 일단 거기서 멈췄다.
6년이 지난 지금 박 전 대표는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첫 조각을 구상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첫 조각이 생각난다. 2008년 2월초 이명박 당선인이 국무위원 후보로 내정한 인물들은 우수수 낙마했다. 필자는 당시 인선의 진짜 문제는 단지 '고소영'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리더로서의 능력과 품성을 검증받은 바 없는 인물들을 장관직에 바로 앉히려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장관 후보 4명, 청와대 수석 1명이 낙마했는데 그중 3명이 평교수에서 바로 발탁된 케이스였다. 평교수가 장관이 되는 것 자체를 문제삼자는게 아니다. 평교수 출신이 성공적으로 장관직을 수행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조직관리 경험, 리더로서 검증된 경력이 전무하다시피한 인물들을 바로 기관장에 앉히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법조인, 언론인, 국회의원 등도 마찬가지다.
임명前 엄격한 평판조회 필요
물론 선진국에도 뛰어난 업무능력을 발휘한 교수출신 장관이 여럿 있다. 그런 사례로 흔히 꼽히는 인물이 스탠포드대 교수 출신으로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다.
하지만 라이스는 평범한 교수에서 바로 장관이 된게 아니다. 1981년 조교수가 된 라이스는 소련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다 1988년 국가안보회의(NSC) 사무국의 소련 전문가로 영입됐다. 2년뒤 대학에 돌아온 라이스는 1993년 재무 및 학사담당 부총장이 된다. 최초의 여성, 첫 소수인종 출신, 최연소 부총장이었다. 당시 스탠포드대는 2000만 달러의 구조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2년만에 대학재정을 1450만 달러 흑자로 바꿔 놓았다. 전문성에 더해 뛰어난 경영능력, 리더십 성적표가 있었기에 2001년 국가안보보좌관에 등용된 것이다.
미국의 학자들은 행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퍼블릭 서비스'라고 부른다.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정한 기간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유명한 교수여도 조직관리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장차관 등 기관장 보다는 실제로 전문성을 살려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무 국장이나 부차관보 등의 직책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진국에서 공직자 임용시 또하나 중시하는 대목은 품성에 대한 평가다. 필자는 워싱턴 주재원 시절, 어느날 아침 낯선 남자의 방문을 받았다. 정부기관 신분증을 내민 그는 앞집에 사는 남자를 공직에 영입할 계획이라고 설명한뒤 그의 평소 행동에 대한 평가를 상세히 듣고 기록했다. 그리곤 또 옆집으로 향했다.
요즘 이동흡 헌법재판소 소장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공직자로서 처신과 품성에 대한 평판들이다. 위장전입, 재산증식 등 도덕성 관련 의혹들은 사실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예단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그의 처신, 행태와 관련해 쏟아지는 주장들은 만약 그중에 하나만이라도 사실이라면 굳이 청문회를 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수준이다.
물론 평판은 주관적이며,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쁜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후보자 검증취재를 해보면 긍정, 부정 의견이 반반 정도로 나오는게 대부분인데, 이번처럼 압도적으로 부정적 의견이 나오는건 처음"이라는게 본보 취재팀의 전언이다. 청와대는 헌법가치 수호기관의 최고책임자를 내정하면서 해당자에 대한 평판을 들어보는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않은 걸까?
이동흡 품성 검증 전혀 안했나
이동흡 후보자는 뛰어난 판사, 공부하는 법관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유능한 법관, 전문성이 뛰어난 교수,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언론인이라는 경력이 훌륭한 리더임을 보장해주는 스펙은 결코 될 수 없다.
필자가 6년전 박근혜 전 대표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개인 박근혜로서 지금까지 이룬 리더로서의 가장 뛰어난 성취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이제 박 당선인은 영입하려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물어야한다. "당신이 지금까지 리더로서 이룬 성취는 무엇이있느냐"고.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주변의 품평을 다층적으로 들어야 한다. 이명박 당선인이 6년전 저질렀고, 임기말까지 되풀이하고 있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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