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활동의 폐쇄성 등을 보면서 박근혜 당선인이 앞으로 국정(國政)을 순탄하게 운영해 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대통령 앞에 놓여 있는 무거운 짐들을 나누어 지고 가는 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금부터 꼭 10년 전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 비서관 내정자 200여 명을 처음 소집한 회의에서 특강을 요청받은 적이 있었다. 주제는 ‘성공하는 청와대 비서실이 되려면’이었다. 내가 청와대 수석,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경제장관 등을 두루 거치고 국회의원까지 하고 있으니까 대통령이 어떻게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 주고 서로 협력하도록 할 것인가를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 말한 주요 메시지는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국정 운영의 안정성을 책임지게 하고, 청와대 비서실은 새 대통령이 국민에게 약속한 변화와 개혁을 지휘하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노 전 대통령은 총리에게 많은 것을 위임하여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책임총리제에 근접하는 국정 운영을 시도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것을 직접 주관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인사권을 독점하여 각급 조직의 창의성을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지난 10년간 두 대통령의 경험만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더라도 박근혜 당선인의 국정 운영방식은 책임과 권한의 분산을 통하여 국민과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고, 정치권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경제 문제만 하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세계경제 환경 속에서 저성장 위기를 극복하고 양극화 해소 노력을 해가면서 복지 확대와 재정건전성을 양립시키는 매우 힘든 짐을 지고 가야 한다.
개발연대나 산업화 시대처럼 대통령이 애국심을 갖고 앞장서서 밀고 나간다고 다 해결되지 않는 것이 민주화 시대의 어려움이다. 이제 국민은 대통령의 의지가 숭고하다고 추종하는 시대가 아니고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먼저 주장하는 시민주권의 시대인 것이다. 의회권력도 커져서 여당조차 일사불란하게 장악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대통령은 무엇이 국가 장래를 위해 옳은 것이냐에만 몰두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국민과 정치권을 설득해서 협력을 얻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무거운 짐을 도저히 혼자서 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총리, 부총리, 장관들은 물론 전문적 직업 관료들과 짐을 나누어 지고 가는 지혜가 필요하고 정치권과 언론과도 손을 잡을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총리에게 국무위원 제청권(提請權)을 주는 일은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총리로 하여금 비경제 부처를 1차적으로 책임 통솔하게 하는 한편 여야 정치권과의 협력, 언론과의 소통, 지자체 관리 등을 전담해서 책임지게 할 필요가 있다. 경제부총리에게는 경제는 믿고 맡기겠다는 자세로 경제부처를 책임 통솔하게 하고,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못할 경우 책임을 묻는 원칙을 세우면 된다. 각 부처 장관에게는 인사권을 돌려줘야 부하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 있게 된다.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국정 운영의 성패가 좌우된다. 역대정권을 보면 권한은 비서실이 독점하고 책임은 내각에 떠넘기기 일쑤였다. 그렇게 되면 권한과 책임의 분산은 물거품이 되고, 모든 짐은 대통령에게 되돌아오고 만다.
인수위가 작은 청와대와 책임장관제를 표방한 것은 현명한 일이다. 비서실장의 역할은 따로 있다. 수석비서관들 간의 주도권 경쟁과 비밀주의에 따른 불통이 생각보다 심각하기 때문에 비서실장이 팀워크를 책임져야 한다. 박 당선인이 약속한 공정한 법치 확립은 검찰, 경찰, 국세청, 국가정보원 같은 공권력 기관을 청와대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주요 보직인사에 개입하거나 중요 사항은 청와대와 미리 상의해서 처리하던 관행을 타파하지 않으면 공권력 행사의 공정성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필자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수석비서관을 맡으면서 국세청장이 오랫동안 해온 대통령 독대보고 관행을 폐지한 적이 있다. 세무조사를 공정하게 하면 되는 것이지 조사 결과를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박 당선인은 과거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사례도 참고로 삼을 만하다. 김 전 대통령은 각 장관에게 업무보고를 들을 때 보고 도중에 자기 소신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 장관들이 대통령 말에 맞춰서 자기 소신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었다. 또 DJP(김대중+김종필) 연립정부답게 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 지도부를 정례적으로 청와대에 따로따로 불러 얘기를 들어주었다. 김 전 대통령은 TV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를 자주 했다. 언론계 주요 인사들과도 청와대 만찬을 수시로 갖고 국민의 주요 관심사를 직접 설명하였다. 박근혜 당선인은 민주화 시대의 대통령이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갈 수는 없다. 나누어 지고 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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