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즐겨 읽는 책 중의 하나가 국적은 대만이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활동한 역사가 진순신의 ‘중국의 역사’다. 진순신은 이 방대한 책의 끝 부분인 청나라 시대를 서술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명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는 정사(正史)인 이십오사(二十五史)를 좌우에 놓고 붓을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정사에 의지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사마천의 사기 이래 25개 정사가 모두 후대 왕조가 전대 왕조의 역사를 쓰는 역대수사(易代修史)를 관례로 삼았다. 청나라가 멸망했지만 아직 청사는 쓰여지지 못했다.
▷전대의 역사는 후대의 전성기에 쓴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라는 말도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청사가 없는 것은 청 멸망 이후의 중국이 확고한 전성기를 맞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 최초의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1928년 청사고(淸史稿)를 편찬했으나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는 1959년 청사고를 수정해 새로운 청사를 내놓았으나 중국 본토의 공산당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1965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주도로 청사편집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역시 문화혁명으로 중단되고 2002년에 와서야 청사를 편찬하는 청사공정(淸史工程)이 시작됐다. 동북(東北)공정도 이해부터 시작됐는데 청사공정의 일부로서의 변경지역 역사 정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청사공정의 결과인 청사는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난해 말까지 나왔어야 하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우리나라도 최초의 정사인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 김부식이 썼고 고려사는 조선 문종 때 와서 완성됐다. 이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면서 조선사를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대한민국 시대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73년 시작해 2003년 조선사까지 한국사 전체를 52권으로 정리했다. 앞서 1969년에는 한국독립운동사를 5권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최근 국사편찬위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편위가 대한민국사(가제·전 10권)를 쓴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사를 대한민국 시대에 쓴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전통 사관에서 보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후대가 전대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시대로부터 떨어져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객관성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역사를 보는 올바른 관점 하나를 국가가 제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전제 왕조시대의 산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당대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 받아들이기 어렵다. 현대에는 복수의 역사, 즉 역사들이 있는 것이지 단수의 올바른 역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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