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워’를 보고 난 40대 중반의 아저씨 하나가 내게 기름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제법 재미나고 영화보다 더 볼만한 건 손예진의 예쁜 자태’란 얘기였다.
맞다. 뇌가 없어 보이는 이 아저씨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타워’ 속 손예진은 참 예쁘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배우 손예진과 이 영화의 치명적인 문제라고 나는 본다.
영화 ‘다이하드’와 ‘타워링’과 9·11테러로 무너진 뉴욕 무역센터빌딩 실화를 짬뽕한 듯한 이 매끈하게 잘빠진 영화는 108층 초호화 주상복합빌딩이 불의의 화재로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하는 모습을 담은 재난 영화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기이한 것은 손예진 자신이다. 바로 옆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불에 타 죽고, 무너져 내린 천장에 깔려 죽고, 갈라진 바닥 사이로 떨어져 죽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정작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움의 신이 내린 보호막이라도 장착한 듯 뺨에 생긴 사랑스러운 생채기 하나와 앙증맞은 검댕뿐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예쁜 얼굴도 기적이지만, 이런 예쁜 얼굴이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지옥도 속에서도 여전히 보존되는 결말이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타워’의 손예진과 영 대조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있다. 최근 개봉된 ‘더 임파서블’의 나오미 와츠. 손예진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45세이지만 그녀는 몇 해 전 영화 ‘킹콩’에서 속옷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꺅꺅 소리만 질러 대는 금발 미녀로 출연했을 만큼 할리우드의 미녀배우로 통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2004년 태국에 밀어닥친 지진해일 실화를 다룬 이 영화에서 목격되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다. 얼굴은 참혹하게 찢기고, 금발은 어느새 떡이 지고, 옷이 찢겨 젖가슴마저 고스란히 노출된다. 눈알은 흙에 파묻혀 ‘동태 눈깔’이 따로 없고, 온몸은 부어서 띵띵하다. 상영시간의 거의 절반을 시체처럼 누워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섹슈얼리티를 떠올리는 남자는 아마도 지구상에 없으리라.
아름답고 출연료도 더럽게 높은 이 여배우는 왜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예쁜 얼굴 보여 준 뒤 값비싼 에센스나 자연 성분의 아이크림 CF 몇 개만 따내면 이보다 더 수지맞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관객 5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레미제라블’에는 나오미 와츠 이상으로 망가지고 파괴되는 톱스타가 나온다. 딸을 살리려 몸을 팔다 죽어 가는 비운의 여성 ‘판틴’을 연기한 앤 해서웨이. 공교롭게도 손예진과 동갑인 그녀는 손예진 못지않게 아름답다. 지난해 배트맨 시리즈 최신작(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캣우먼’으로 출연해 온몸에 달라붙는 까만 비닐 옷을 입고 혀를 날름거리며 ‘야옹야옹’ 하고 유치를 떨던 그녀지만, 이 영화에선 눈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가련한 몰골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쥐가 파먹은 듯한 ‘영구머리’를 하고 나온 그녀가 핏기 없는 몰골로 ‘I Dreamed A Dream’을 부르며 숨져갈 때 나는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그녀의 발가락이라도 씹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예쁜 여배우들은 나이 서른을 넘으면 자꾸만 초조해진다고 한다. 더 젊고 싱싱한 여배우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데다, 이 동정 없고 정절도 없는 세상은 자꾸만 새로운 얼굴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여배우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미모와 젊음이 결코 죽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잘못된 해법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외려 상실해 버리기도 한다.
아, 불현듯 이순신 장군이 남기신 명언이 떠오른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길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기를 바라면 반드시 죽는다)…. 자기도취가 예술가의 특권이라면, 지독한 자기 파괴는 진정한 예술가만이 즐기는 숙명적 책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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