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인의 대선공약 재원 마련을 둘러싸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정부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세출 구조조정을 통한 예산 절감 등으로 71조 원, 비과세·감면 축소 등 세제 개편을 통해 48조 원 등 5년간 134조6000억 원을 추가로 마련해야 박 당선인의 복지공약 등을 모두 실행할 수 있지만 이 일이 영 만만치 않아서다.
구성 초기에 인수위는 각 정부 부처에 예산지출 삭감안부터 지시했다. 대부분의 부처가 지출을 줄이는 ‘시늉’을 내는 데 그치자 인수위는 예산을 총괄하는 재정부에 1월 말까지 재원을 마련해내라고 요구했다.
일단 예산당국은 난색을 표했다. 모든 공약을 동시에 실행하는 건 재정 건전성에 큰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새누리당 의원과 경제, 재정학자들도 같은 이유로 ‘공약이행 속도 조절론’ ‘공약 수정론’을 제기했다. 이런 분위기를 일소한 건 “내가 약속을 하면 여러분은 지켜야 한다”는 박 당선인의 짧은 한마디였다. 한 달 뒤면 행정부 수장이 될 그의 강경 메시지에 정부 예산당국자들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산당국이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을 리 없다. 공무원 다그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명박 대통령도 정부 출범 초기에 2조5000억 원을 줄이는 데 그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모든 항목에 수혜자가 딸려 있는 정부지출을 대폭 줄이는 건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이런 상황을 속속들이 아는 정부는 일단 대선공약에서 복지 재원 마련의 가장 큰 부분인 세출 조정 대신 비과세·감면 감축을 통한 재원 부분을 더 키우는 대안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비과세·감면 축소도 문제다. 박 당선인은 “비과세와 감면은 일몰되면 무조건 끝이다.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고, 그것 가지고 싸울 필요가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정치적인 고려로 계속 연장돼온 비과세·감면의 잘못된 관행을 끊어야 한다는 박 당선인 말에 십분 공감해도 실제로 이를 없애는 과정에서 많은 반대와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3대 비과세·감면 항목’인 연구·인력개발비 세액공제, 신용카드(체크카드, 현금영수증 포함) 소득공제, 농어민 면세유는 각각 중소기업, 월급쟁이, 농어민의 실생활에 직결된 혜택이다. 박 당선인이 “증세(增稅) 없이 가능하다”고 강조할 때의 ‘증세’는 통상 세율 인상을 뜻하지만 오랫동안 감면받던 세금을 내는 사람으로서는 비과세·감면 축소도 증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어쨌든 재정부는 조만간 재원 마련 방안을 마련해 인수위에 보고해야 한다. 박 당선인의 강한 경고를 받은 재정부 공무원들의 마음속은 일종의 ‘보히카(BOHICA) 증후군’ 상태다. ‘BOHICA’란 ‘엎드려! 또 시작이다(Bend over! Here it comes again)’라는 뜻의 미군 군사용어. 한 차례 총질하다가 한참을 쉬는 참호전에서 비롯된 말로 ‘지금 상황만 넘기고 보자’는 냉소주의다.
이들 공무원은 어떻게든 당선인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안을 내놓을 공산이 크다. 이 보고를 근거로 복지혜택을 크게 늘렸다가 나중에 여기저기서 구멍이 나고 재정 건전성에 문제가 생겨도 담당 공무원들로서는 지금 당장을 넘기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공무원들이 내놓는 재원 마련 방안에 박 당선인이 흡족해한다면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박 당선인은 한 달 뒤 나라살림을 책임지는 최고경영자(CEO)가 된다. 정치인이라면 정부를 다그쳐 더 많은 정책을 관철하는 게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CEO는 달라야 한다. “조직을 위해 정말 하면 안 되는 일은 안 된다고 얘기하라”고 말하는 CEO가 제대로 된 CE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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