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미국 일리노이 주)와 싱가포르. 두 도시는 막역한 관계다. 싱가포르가 시카고를 모델로 삼아 개발, 성장한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시카고는 ‘건축의 도시’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1885년 완공된 지상 9층, 지하 1층의 홈인슈어런스빌딩)가 상징하듯 20세기 모던건축이 여기서 태동했다. 그 배경은 대화재(1871년)다. 건축엔 세 가지 조건(땅과 건축가, 건축주)이 있다. 대화재는 건축 용지를 제공했다. 당시 시카고에는 수많은 은행(건축주)과 세기말의 새로운 기운(건축가)도 넘쳤다.
콘벨트에서 수확한 옥수수는 시카고의 선물시장에서 거래된다. 선물시장에는 돈이 넘쳐난다. 시카고 금융가가 뉴욕 다음으로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도시든 같다. 최고 건축물 주인이 금융회사란 것은. 대화재 이후 지구촌은 세기말의 기운에 휩싸인다. 새 천년에 대한 기대가 전방위로 확산되는 변혁의 시기였다. 건축공법과 디자인에 새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이걸 수용할 건축주를 만나지 못하면 무용지물. 그래서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시카고로 모여들었다. 넓은 땅에 금융회사라는 건축주를 보고서다. 세계 최초 마천루는 그렇게 건설됐다. 그런 시카고 건축의 표상은 ‘시카고 윈도’(벽면의 대형 유리창)다. 철골조 덕분에 내력(耐力)벽을 유리로 대체한 것이다.
시카고는 미국의 세 번째(뉴욕, 로스앤젤레스 다음) 도시로 중부의 중심. 그런 시카고 발전의 주역은 물길이다. 미국 남부의 멕시코 만, 동부의 대서양을 연결하는 미시시피, 세인트로렌스 등 두 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카고는 미시간 호반(오대호 중 하나)에 있다. 오대호는 모두 연결됐고, 그 물은 이리 호를 빠져나와 강(세인트로렌스)을 이루며 대서양에 흘러든다. 한편 시카고 서쪽의 미시시피 강과 미시간 호는 일리노이, 시카고 두 강을 잇는 두 개의 인공운하로 연결했다(1848년). 이렇게 해서 시카고는 대륙의 두 바다로부터 배가 오가는 수운(水運)중심이 된다.
수운은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북미대륙 수송의 주역. 그러니 물류유통회사 시어스(백화점)가 시카고에 자리 잡은 건 당연한 일. 한때(1973∼1996년) 북미 최고층(110층) 건물이었던 시어스타워는 그렇게 건축됐다. 이런 건축도시 시카고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시월애’의 할리우드판 리메이크 영화 ‘레이크하우스’다. 시카고를 배경으로 키아누 리브스가 건축가로 등장한다.
그러면 시카고를 모델로 삼은 국제도시 싱가포르는 어떤가. 그 시작은 1819년, 주인공은 영국(동인도회사)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무역의 국제물류중심으로 개발됐고 현재도 홍콩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규모의 무역항이다. 싱가포르의 국제금융은 거기서 태어났다. 유럽과 호주 뉴질랜드, 아시아를 잇는 항공교통의 허브가 된 것도 같다. 싱가포르 강변의 허다한 외국계 투자은행, 창이국제공항의 싱가포르항공을 주축으로 한 항공 및 교통산업이 그 예다.
그 금융가엔 마천루가 바늘 꽂듯 빼곡하다. 시카고를 방불케 하는 모습인데 이런 건축의 배경 그 자체가 시카고다. 시카고의 철골조 건축은 미시간 호반의 무른 습지의 지반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싱가포르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지반이 바다 개펄이어서다. 그런 시카고와의 인연은 시카고대 싱가포르분교(경영학 스쿨)로 발전한다. 지도자가 장기간 바뀌지 않고 대물림한 것까지도 닮았다. 데일리 시장 부자(父子)가 통틀어 43년(1955∼76년, 1989∼2011년)을 이끈 시카고처럼 리콴유 전 총리의 30년 통치에 이어 아들(리셴룽 현 총리)이 7년째 이끌고 있다. 네이버후드(다양한 민족의 사회)도 공통점이다.
우리에게도 건설 중인 도시가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과 새만금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곳엔 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싱가포르와 시카고에서 보듯 도시의 성공 여부는 건축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곳엔 땅과 건축가만 보일 뿐 좋은 건축주를 기대하기 어렵다. 좋은 건축주란 곧 도시 성장의 발판이자 주체다. 그런 산업을 갖추지 않는 한 도시는 발전할 수 없다. 땅만 있다고 도시가 세워지는 건 아니다. 싱가포르와 시카고는 그걸 가르쳐주는 모범답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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