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종대]달라도 너∼무 달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1일 03시 00분


하종대 국제부장
하종대 국제부장
“인사청문회 과정이 신상(身上) 털기 식으로 간다면 누가 나서겠느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30일 강원지역 새누리당 의원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아마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치렀지만 낙마 위기에 몰린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와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됐다가 사퇴한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특히 장애를 이겨낸 청렴 이미지의 김 위원장 낙마는 박 당선인으로서는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인사청문회가 이런 식이라면 예수님이 와도 통과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국회와 언론의 검증 기준이 너무 혹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사청문회의 원조 격인 미국의 검증 기준은 한국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1789년부터 시작해 2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미 의회의 인사청문회는 우선 대상자가 장차관 등 600여 명에 이른다. 대통령이 의회 동의를 받아 임명해야 하는 사람은 무려 1만6000여 명이다. 하지만 2000년부터 시작한 한국은 청문회 대상자가 국무총리와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감사원장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등 60명에 불과하다. 이 중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한 자리는 단 23개뿐이다.

사전 검증도 철저하기 그지없다. 대통령의 인선 과정에서 백악관 인사국의 사전 스크린과 연방수사국(FBI)의 신원 조회, 국세청(IRS)의 세무조사, 공직자윤리위원회의 검증 작업이 물샐틈없이 이뤄진다. 이 기관들이 기본적으로 점검하는 항목만 개인 및 가족 배경(61개), 직업 및 교육 배경(61개), 세금 납부(32개), 교통범칙금 등 경범죄 위반(34개), 전과 및 소송 여부(35개) 등 무려 223개 항목이다.

이렇다 보니 인선 작업부터 의회 인준까지 최장 1년 가까이 걸린다. 미국의 방식이라고 모두 금과옥조는 아니지만 ‘깜짝 인선’과 20일 이내로 규정된 한국의 국회 청문회와는 천양지차다.

대통령직인수위 일각에서는 “미국은 청문회에서 능력과 자질만 따지는데 왜 한국은 도덕성 검증에 더 치중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이유가 있다. 미국은 이처럼 철저한 사전 검증으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청문회장을 구경도 못한다. 각종 비리 의혹을 제대로 해명도 하지 않고 후보자가 청문회에 나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인수위 주변과 여권에서는 “1970, 80년대 여유자금이 있었던 사람 중 부동산 투기를 안 한 사람이나, 논문 베끼기에서 자유로울 학자가 얼마나 되겠느냐” “국민의 기대치를 충족할 후보자가 거의 없는 게 우리나라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1970, 80년대에 살았다고 다 이랬을까. 돈이 없어 이렇게 살지 못한 사람도, 돈이 있어도 이렇게 살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다. 최소한 미국의 절반만큼만 사전 검증 절차를 거쳤더라도 정권 인수 전부터 불미스러운 일로 후보로 지명된 사람이 낙마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불의한 방법으로 치부한 사람이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고 심지어 명예까지 독차지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고위 공직에 오르려면 적어도 재산 형성 과정이나 도덕성에서 하자가 없어야 한다.

고위 공직자에 대해 높아진 국민 눈높이를 탓한다면 제대로 된 정치인이 아니다. 미국을 보라. 힐러리 클린턴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으로 유력했던 수전 라이스 유엔 대사는 단순히 지난해 9월 리비아 벵가지에서 발생한 미 영사관 피습으로 외교관 4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알카에다 세력에 의한 계획적 테러가 아니라 시위에서 촉발된 우발적 사건”이라고 말했다가 ‘사건 고의 축소 의혹’을 받아 결국 도중하차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달라도 너∼무 달라’ 아닌가.

하종대 국제부장 orionha@donga.com
#인사청문회#언론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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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은 댓글

  • 2013-02-01 13:39:18

    국내 분위기밖에 모르시는 분이 미국내 정치환경을 이야기 하다니. 미국에서 인신 공격성 서류를 들고 언론플레이를 하다가는 사회적으로 매장되시는 걸 아시나요? Dan Rather가 거의 없어지다 시피한걸 모르시나요.(한국은 어떤가요. 아니면 말고식의 언론이 아닌데요

  • 2013-02-01 12:23:21

    정말 유익한 글입니다. 대한민국도 언젠가는 ...다만 시기의 문제이지...세밀한 사전 검증을 할 때가 있을 것이고 지금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미국은 땅이 넓고 기회가 많으며...동양적인 정이란 것과는 온도 차이가 있습니다.

  • 2013-02-01 10:54:38

    미국은 청문회에서 불법여부만을 가리는데 우리는 국민감정으로 가리는데 차이가 있다. 수잔라이스의 경우 '단순히'가 아니라 확실치도 않은 정보로 미국대사가 사망한 사태를 호도했기때문에 미국의안전과 이익에 반하는 업무수행능력에 대한 평가이다.결코 우리식 신상털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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