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화자는 헉헉대며 열심히 꽉 찬 하루를 보내는 사람인 듯하다. 잠자리에 들 때면 문득 사는 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꽉 메어 잠을 이루지 못하곤 한다. 화자는 달리 꼭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이다. 잠을 잘 못 자니 머리는 멍하고 몸도 찌무룩해서 무감각하니 의기소침하게 지내던 어느 날, 퍼뜩 화자를 깨어나게 한 게 있다. 비에 젖어 더욱 싱싱하게 생기를 뿜고 있는 자운영꽃!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했다지만, 화자의 ‘이러고 있는’ 나날들 깊이 묻혀 있던 갈망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초조감이 꿈틀 싹을 틔운 것이다.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이 세련되고 아름다운 시구들, 시인의 감수성으로만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인과관계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봄날, 후줄근한 마음으로 걷던 화자가 찌르르 전율하며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뚝 멈추고 응시한 자운영꽃. 송알송알 빗방울들, 화자의 마음에 맺히듯 그 청보라색 꽃잎에 맺혔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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