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세종시로 먼저 간 공무원들의 소소한 불편에는 크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국가균형 발전과 분권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공직자들이 솔선해 불편을 감당해야지 달리 누가 하겠는가. 10여 년 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에 기자는 찬성했고 ‘행정수도가 정착된 후 입법·사법부가 뒤따라가면 더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2004년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위헌결정 후 여야가 행정중심복합도시에 합의해 수도를 쪼개려는 것을 보면서는 ‘이건 아니다’며 반대했다. 부처를 흩어 놓는 것은 정부의 경쟁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까닭이다. 국민이 누려야 할 행정서비스의 질을 두고두고 훼손하는 것이다.
철벽 앞에 선 듯한 좌절의 기억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제시했을 때 박근혜(GH) 당시 의원은 ‘약속 지키기’를 명분으로 반대의 배수진을 쳐 주저앉혔다. 그때 기자는 철벽 앞에 선 듯한 좌절을 느꼈다. 국가지도자로서 GH의 자질,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의심했다. 지금도 기자는 GH가 그 결정으로 충청 표심을 얻고 결국 대권을 얻는 등 큰 정치적 이익을 봤지만 그로 인해 나라가 치러야 할 대가는 참 클 것이라고 본다.
안 좋았던 그 기억이 요즘 다시 떠오른다. 최근 거듭된 GH 인사 패착은 불통(不通)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국정(國政)의 불통이다. 잘못된 인사는 상대적으로 검증이 쉽고, 다시 인사를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수습된다. 반면 국가정책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회임(懷妊) 기간이 길어 잘못된 선택이 오랜 기간 그냥 간다. 훗날 나타난 손실은 원상복구가 힘들며 국민이 겪어야 할 고통이 깊고 길다.
현재 인사 이슈에 밀려 ‘공약과 재원(財源)’의 문제가 잠깐 소강 국면이지만 기획재정부 재정학회 건전재정포럼 등 전문가 집단은 일치된 목소리로 “공약 이행에 필요한 재원이 모자란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약을 털어내든, 증세를 하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회피할 경우 수백조 원어치의 국채를 발행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나라 망치는 길이다.
GH는 “선거 때 다 계산해보고 내놓은 공약이다. 이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 검토했다고? 억장이 무너진다.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재정부 등의 분석보다 선거 와중에 캠프 멤버들이 내놓은 검토 의견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균형감각 보유자인가? 좀 더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 재능이 필요하다. 반면 애써 그린 그림을 망쳐버리는 일은 너무 쉽고 순식간에 할 수 있다. 국가도 그렇다.
공약 구조조정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요즘 진보는 ‘공약을 지키겠다’는 당선인을 편든다. 훗날 ‘불이행’을 빌미로 정권을 타격하려는 속셈이다. 반면 ‘진짜 GH 편’인 보수는 정권의 부담을 미리 덜기 위해 공약 털어내기를 역설하고 있으니 부디 경청하라”는 주장을 편다.
유연성 잃은 대통령은 실패한다
뭐 그런 경우도 있을 게다. 하지만 재정 관련 부처나 학술단체의 발언에 GH를 감싸거나 혹은 흔들려는 정치적 의도는 없을 것이다. 그저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고 전문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한때 당선인은 재정 전문가들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것처럼 대응했다. 새 정부 출범에 재 뿌리려는 것인지 의심하는 듯했다. 안 된다. 제발 그냥 듣고 있으시라. 충분히 검토한 후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면 된다. 당선인에겐 ‘얼음공주’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별명이 있다. ‘한 번 한 말은 최종 결론’이라는 고집도 강하다. 판단에 이르기까지 토론이 부족하고, 누구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지도 베일에 싸여 ‘신탁(神託)을 받는 것 같다’는 우스개까지 나오는 판이다. 정책은 유연성과 완급 조절이 생명이다. 유연하지 못한 정권 또한 반드시 실패한다. 대통령의 불통은 나라에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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