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이 아내 김영주(토지문화관 이사장)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가을이었다. 술은 마시고 싶지만 돈이 없던 시절, 야밤에 문단의 지인들과 소설가 박경리 선생 집으로 쳐들어간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김 시인은 담시 ‘오적’으로 유명 인사가 된 뒤였고 박 선생도 ‘토지’를 내놓아 문단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며칠 뒤 유신이 선포됐다. 김 이사장은 집으로 찾아와 숨겨달라고 부탁하는 김 시인을 보면서 “내가 가진 복을 이 사람에게 반만이라도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73년 4월 명동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결혼한다. 단단히 각오한 일이지만 김 이사장이 살아오면서 겪은 고초는 상상 이상이었다.
첫아이 출산을 앞둔 어느 날, 남편은 어디론가 끌려간 뒤 1년간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이후 수감된 것을 알게 돼 젖먹이를 안고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남편은 정신착란까지 일으킨 독방 수감을 마치고 풀려났지만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모친 박 선생의 말대로 ‘6·25 때보다 더 힘든 내전’을 겪은 것이다.
“김 시인이 감옥에 있었던 6년 동안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김 시인을 단순히 반(反)박정희의 도구로만 생각했다. 출감한 김 시인더러 ‘감옥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남편이 20년간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김 이사장은 두 아들 양육에서부터 집안 살림, 간호까지 모든 것을 책임졌다. 본인도 건강이 나빠져 머리숱이 모두 빠지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었다. 얼마 전 차남 혼사를 치른 그는 “이제 겨우 숨 좀 돌리고 살 만하다”고 말한다.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어떻게 저토록 힘든 삶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경외심이 든다. 하지만 그는 지난 일을 무심하게 말하며 작은 일에도 소녀처럼 웃는다. 어려움을 자양분 삼아 갈무리한 사람만이 갖는 내공이 느껴진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분노’가 없다. ‘박근혜 지지 선언’으로 남편을 욕하는 민주당 의원이 항의 전화를 했을 때도 “입장과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비판해도 좋다. 하지만 인격적인 모욕은 삼가는 게 예의”라고 한 뒤 “민주당이 제대로 해야 나라가 발전한다. 좋은 국회의원이 되어 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았다. 바른 소리를 조리 있게 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과 마음을 쓰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포용’이나 ‘통합’ 같은 말이 무색해진다.
연세대에서 사학을 전공해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김 이사장은 본래 불교미술을 공부해 강단에 서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남편의 전력 때문에 논문 발표조차 힘들었다.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재능을 아껴 이화여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것을 권했지만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로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공부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잠을 줄여가며 부엌 식탁에 앉아 두툼한 ‘한국미술사’(나남출판·1997년)를 펴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미술사를 깊이 있으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정리한 것을 보면 학자로서의 풍모도 느껴진다.
김 이사장의 모습엔 생전에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올곧게 살았던 모친 박경리의 삶이 겹쳐진다. 이젠 여성 대통령까지 나온 터라 곳곳에서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진정한 여성의 힘은 안으로 기운을 쌓고 조용히 발산하는 여성 특유의 ‘내공’에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모성(母性)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정한 여성의 롤 모델을 만난 듯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