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강한 대통령, 허약한 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8일 03시 00분


박성원 정치부장
박성원 정치부장
‘국민의 정부’ 출범을 앞둔 1998년 2월 어느 날 새 정부 고위직에 내정된 A 씨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에게서 이런 당부를 들었다.

“앞으로도 내가 좀 잘못하는 것 같다 싶으면 언제든 주저 없이 곧장 얘기해 달라. 당신 같은 사람이 얘기 안 해주면 누가 해주겠느냐.”

A 씨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취임 뒤 얼마 후 있었던 첫 ‘국민과의 대화’에서 그대로 실행했다. 거의 모든 참모들이 “대통령님의 진심이 그대로 전달된 감명 깊은 연설이었다”는 등 찬양 일색일 때였다. A 씨는 “나는 이렇게 열심히 IMF 극복을 위해 뛰는데 야당은 발목만 잡고 있다는 식으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 있었던 게 옥에 티라면 티”라고 한마디 했다. 김 대통령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지만, 표정은 영 섭섭해하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참모 보고서로 민심 파악

A 씨는 이후 대통령에게 이런 게 어떻고 저런 게 어떻고 할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몇 달 뒤 대통령과 자주 볼 일이 없는 자리로 인사발령이 났다.

노무현 정부 초기 대통령 집무실에는 여느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매일 아침 조간신문의 주요 기사를 요약한 보고서가 올라갔다. 그런데 여러 라인에서 올라오는 보고서 중에 유독 노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한 실무자가 스크랩한 보고서였다. 이 실무자가 선별한 보고서엔 자주 대통령이 ‘그렇지’라고 무릎을 치며 공감을 표시하는 기사들로만 채워졌고, 기사 밑엔 작은 글씨로 기사에 대한 촌평과 함께 독창적인 정책추진 참고 의견까지 달려 있었다. 이 실무자는 승승장구한 끝에 참여정부의 요직을 맡았다. 노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B 씨는 훗날 “처음에는 대통령이 괜찮다고 해서 맞담배도 피우고 농을 함께 섞기도 했는데 갈수록 그러기가 불편해지더라”고 회고했다.

조선시대 사간원의 관리들은 임금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만 골라서 보고하는 것이 기본임무였다. 신문, 방송이 아무리 대통령에게 쓰디쓴 시중 민심과 정책상 문제점들을 지적한들 분 단위로 일정이 빠듯한 대통령이 직접 보지 않는 한 참모들이 걸러서 올리는 보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주변에 쓴소리까지는 몰라도 각종 현안을 상의하고 조언할 참모그룹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낙마 이후 도덕성 문제로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된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도 사퇴시켜 인사문제의 흠결을 조기에 바로잡자는 의견이 일부 친박 의원들을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일제히 잠수를 타버렸다. ‘특정업무경비를 콩나물 사는 데 쓰면 안 된다’며 이동흡 후보자의 문제를 지적했던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며칠 만에 “국회에서 인준투표를 해야 한다”로 돌아섰다. 당선인의 의중이 뒤늦게 파악됐기 때문 아니냐는 뒷담화가 나오고 있다.

‘쓴소리’ 부재에 우려 높아

이런 소통구조 아래선 새 정부 출범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인사문제를 놓고 직언할 수 있는 참모가 나오기 어렵다. 새누리당 국회의원 당협위원장 200여 명이 모처럼 자리를 함께했던 6일 3시간 동안의 연석회의에선 현안에 대한 토론도 없었고 박 당선인의 일방적 당부만 있었다.

호주 시드니대의 존 케인 교수는 ‘모니터링 데모크라시’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그 효과와 문제점을 체크해 적시에 정책결정자에게 전달해주는 기능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1987년 개헌 이후 최초의 과반수 득표에다 여당 내부에 반대그룹이 없고 야당마저 지리멸렬한 ‘슈퍼 대통령’. 그러나 막강해 보이는 ‘박근혜 대통령’ 옆에 직언할 수 있는 참모그룹이 보이지 않는다면 머잖아 국민들은 ‘허약한 정부’의 실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박성원 정치부장 swpark@donga.com
#대통령#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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