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65>눈썹 ―1987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13일 03시 00분


눈썹 ―1987년
―박준(1983∼)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의 한 해 전, 누나도 어렸다니 화자는 더 어렸을 테다. 엄마가 ‘봄날 아침/일찍 수색에 나가’셨다니 화자가 살던 집은 서울 서북쪽 외곽인 수색보다 더 바깥쪽이다. 넉넉지는 않아도 알근달근한 한 가정, 저녁상 자리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밥상을 엎고 아이들은 ‘노루처럼/방방 뛰어다’니며 울부짖고. 원인은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온 것.

시에 그려진 그 봄날, 엄마의 유유한 행보에는 아마 이웃 아낙 몇이 함께했을 것이다. 한 동네 아낙들이 우르르 목욕도 하고, 반점(飯店)에서 (아무렴, 반점에는 ‘화교 주방장’이지) 우동도 먹고, 미용실에도 들르고. 눈썹 문신을 하러 미용실에 들른 건 아닐 텐데 분명 미용사님께 꼬임을 당했을 것이다. 실력도 별로였을 미용사님한테 ‘야매’로 눈썹 문신을 시술받은 뒤 미용실 거울을 보며 엄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시커먼 ‘지리산’ 두 개가 이마에 턱 얹혀 있으니까. 미용사님은 예쁘다고 설레발치셨을 테고 엄마는 긴가민가하며 울상을 하고 웃었을 테다. 어쩌면 같이 간 동네 아낙 모두 같은 형상이 돼서 그날 저녁 집집마다 아내들이 남편한테 봉변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떤 남편은 낄낄 웃었을라나? 당최 화를 참지 못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대한민국이 전반적으로 가난의 때를 벗기 시작한 1987년, 화자의 아버지는 그 대열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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