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왔다. 통영은 아름다웠다. 푸른 달빛 같은 물빛, 바람 지나가는 보리밭 이랑처럼 이는 물결, 입술을 꾹 다문 대양(大洋)의 수평선, 저 건너 먼바다에 홀로 웅크린 독행(獨行)의 섬들, 작은 어선들이 정박한 항구, 긴 해변, 낙양(落陽)의 끝을 보여주는 언덕, 파닥파닥하는 새와 물고기, 순수하고 인정이 두터운 사람들 등등. 귓가에 내내 바다가 사르락거렸다.
통영은 예향으로도 단연 손꼽힌다. 유치환, 윤이상,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나전칠기 명장 김봉룡 등이 통영에서 났다. 윤이상은 어릴 적 통영에서의 체험을 일러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 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록의 바람도 내게 음악으로 들렸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버지를 따라 밤낚시를 갔을 때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와 어부가 부르는 남도창의 울림을 바다 수면이 멀리까지 전해 주었다고도 했다. 시인 김춘수도 일생의 마지막 무렵에 여러 편의 시에서 통영을 노래했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바람이 불고, 물새들이 울고 간다./저마다 입에 바다를 물었다’(‘찢어진 바다’)고 쓰거나,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고치라고 한다./우리 고향 통영에서는/통영을 토영이라고 한다./팔을 폴이라고 하고 팥을/.이라고 한다./ … /우리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내 또래 외삼촌이/오매 오매 하고 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앵오리’)고 썼다.
김춘수는 금빛 털을 세우는 짚신게가 있는 통영의 어물전과 해풍이 잘 닿는 야트막한 비탈을 좋아했다. 볼락젓의 맛을 보고는 “심각하다”고 말했다는 김동리와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통영 여행에서의 보람은 화가 전혁림을 알게 된 일에 있었다. 통영에서 태어난 전혁림은 ‘색채의 마술사’, ‘코발트블루의 화가’로 불렸다. 그는 바다의 화가였다. 잠시 고향 통영을 떠나 살기도 했지만 이내 돌아와 미륵산 자락에서 살았다. 전혁림 미술관은 전혁림이 1975년부터 서른 해 가까이 살았던 집터에 들어서 있다.
미술관 외관은 특이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전혁림의 작품과 화가 전영근의 작품을 7500여 장의 세라믹타일로 만들어 붙였다. 전혁림의 아들 전영근은 부친을 예술적 스승이자 동지로 모셨고, 이 미술관의 외장 타일을 모두 손수 제작해 시공했다. 화업의 대를 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친에 대한 그의 극진한 효심은 통영 사람들의 오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생전에 전혁림은 “우리 아들 재능으로 보아서 지금 아버지 뒷바라지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자주 말했다 한다.
전혁림은 말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노구의 그가 사용하던 화구와 작업할 때 신었던 신발은 내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물감이 잔뜩 묻은 손, 그 늙고 주름진 작업하는 손을 사진으로 보았을 때 곧바로 뭉클해졌다. 그의 작업은 회화, 조각, 벽화, 도자기 등에 두루 넘나들었지만 작품들은 통영의 바다와 전통적인 ‘우리 것’으로부터 태어났다.
코발트블루의 색채와 오방색 색채의 사용이 그것이다. 전혁림은 코발트블루를 “쪽빛 한술(숟가락으로 한 번 뜬 양)에 청색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일어나는 번짐의 가장자리색”이라고 했다. 김춘수 시인이 시 ‘골동설(骨董說)’에서 “전화백(全畵伯),/당신 얼굴에는/웃니만 하나 남고/당신 부인(夫人)께서는/위벽(胃壁)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코발트블루(Cobalt blue),/이승의 더없이 살찐/여름 하늘이/당신네 지붕 위에 있었네”라고 쓸 정도로 전혁림의 대표적 색채가 이 코발트블루였다. 통영 앞바다의 사철 변화가 그의 작품의 무궁한 원천이었고 그것이 코발트블루의 작품 세계를 탄생시켰다면, 우리 전통에 대한 그의 독창적 해석은 우주적 오방색 색감과 민화적 풍물의 등장으로 드러났다.
전혁림의 필생(畢生)은 예술가 혹은 인간의 초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는 검박하게, 세풍(世風)에 격절하고 살았으며, 독학으로 그림에 입문한 후 오직 스스로 전념하여 출중한 깊이를 얻었다. 중앙 화단과의 관계, 학연과 지연 등에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았다. 고향과 옛것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일도 없었다. 서구 취향만을 우월하다고 여겨 좇던 부류들과도 달랐다. 자기 작품 세계의 원천이었던 ‘아침마다 찾아오던 온전한/그 바다’(‘찢어진 바다’)를 소중히 여겨 예술적 상상력으로 가꾸었고, 궁구하여 진전시켰다. 세간의 대중적 평가에 연연하거나 내리쏠리지 않았다.
본바탕도 모르고 더욱더 많이 금전, 명성 등 세속적 잇속을 추구하다 구설수에 오르게 된 면면의 사람들과 그들의 인심(人心)에 요지부동으로 들어앉아 있는 속물근성에 견준다면 이 한 예인의 올곧은 성품과 은거(隱居)와 한소(寒素)한 삶은 많은 것을 돌이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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