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경주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근로자로 일하던 약 600명이 정규직으로 채용돼 입사자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약 6주간의 교육이 끝나면 이들은 정규직으로서 희망찬 업무를 시작할 것이다. 현대차는 이런 형식으로 금년에만 1750명을 채용할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늘려나갈 것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부산 한진중공업에서는 특수선을 발주하러 온 유럽인 선주와 회의가 열렸다. 노사관계 불안으로 납기가 지켜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선주에게 노조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안심시켰고 회의는 부드럽게 진행돼 지난 몇 년 동안 일감이 없어 힘들었던 회사에 모처럼 수주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따뜻한 기운만 감도는 것은 아니다. 현대차 주차장 송전탑에서는 모든 사내하청 근로자를 무조건 현대차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고공농성이 벌써 120일 넘게 진행되고 있고, 법원의 철거 집행조차 두 차례나 물리력에 의해 무산됐다. 한진중공업에서는 대표노조가 아닌 소수노조가 자살한 근로자의 시신을 회사 내부로 옮겨다놓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취하하라며 20일 넘게 시신농성을 벌이고 있다.
참 안타까운 모습들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왜 우리나라 노사관계가 아직도 봄을 맞지 못하고 일부에서는 동토에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있다.
첫째, 협상 대상이 아닌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내하청 문제만 해도 직원 채용은 회사 인사권에 속하며 교섭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교섭이란 고용관계가 있는 노동조합과 하는 것인데 사내하청노조는 고용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10년 전에 하청업체에서 잠깐 일했고 회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노조간부까지 정규직으로 무조건 채용하라고 요구한다. 한진중공업에서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취하하는 것 역시 교섭 대상이 아니다. 손해배상 청구액으로 158억 원은 너무 많지 않으냐는 의견도 있으나 이 또한 법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둘째, 상식과 도덕을 뛰어넘을 정도로 행동이 과격하다. 복면을 쓰고 죽창을 휘두르며 생산공장을 점거하려 한다. 전쟁에서처럼 여럿이서 무거운 쇠봉으로 두꺼운 조선소 철문을 부수고 시신을 들고 들어간다. 전쟁터에서도 시신은 먼저 수습하는 법인데 우리 노동현장에서는 시신이 투쟁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 행동이 과격한 것은 기성 질서의 파괴를 전혀 개의치 않는 외부세력이 개입하고 조종하기 때문이다. 현장에 가보면 노동자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을 내세우는 단체들의 플래카드가 즐비하다.
무리한 요구조건을 걸고 과격한 투쟁을 하는 데는 문제를 대화로 풀기보다는 사회적 파장을 최대한 크게 일으켜 정치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의도가 있다. 정치인들은 그걸 뻔히 알면서 현장을 찾아가 이들의 기대를 높여놓고는 국정조사다 뭐다 하면서 기업 경영자들을 불러들인다. 겉으로는 점잖게 권고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팔을 비틀어 사측의 양보를 얻어낸다. 그러나 정치권의 개별 노사문제 개입은 지금까지 문제를 악화시켜 왔을 뿐이다. 재작년 국회에서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렇게 종결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 크레인 농성 당사자는 개선장군이 되었고 제대로 사법처리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은 시신투쟁을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또 그 이후 현대차의 송전탑 고공농성을 비롯해 여차하면 높은 데 올라가서 떼쓰는 것이 유행이 되지 않았는가.
정치권 개입의 더 큰 폐단은 온건 합리적 노동운동의 설 땅을 없앤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노조위원장이 조합원의 높은 기대와 회사의 어려운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며 대화와 타협으로 합의를 이뤄왔다. 그렇게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조금씩 노사 간에 신뢰를 쌓아왔다. 그런데 다른 쪽에선 무리한 주장을 내걸고 법질서 파괴를 일삼는다. 그러면 희망버스와 함께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인들이 달려와 한바탕 굿판을 벌이고 해결해주고 간다. 그러니 과격하면 영웅이 되고 온건하면 바보가 되는 노사관계가 된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사회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다만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필요한데 노사 갈등 해결에는 고전적 규범이 있다. 그것은 법과 원칙의 존중, 당사자주의, 그리고 대화와 타협이다. 이 중 가장 근본은 법과 원칙이다. 법과 원칙은 누가 당사자며 누구의 권리가 우선하는지 규정함으로써 대화와 타협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찰 및 사법당국의 신속하고 엄정한 법질서 집행이야말로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사회 통합을 위한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사문제도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위해 애쓸 것이다. 새 정부의 이런 노력에 모두가 동참해 공동체의식을 회복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국민 통합은 법과 원칙의 수호와 함께 가야 한다. 통합을 명분으로 불법을 껴안는 것은 오히려 통합을 저해하는 것이다. 밥을 지을 때 돌을 골라내지 않고 밥을 지으면 쌀밥이 아니라 돌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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