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험난했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 20여 년의 유럽 권력정치를 아주 닮았다. 민족주의 고조, 영토 분쟁, 효율적인 안보협력기구 부재, 경제 교류가 깊으면서도 경쟁과 불신의 벽이 높은 점이 그렇다. 그때의 유럽과 지금의 동아시아에서 공통된 현상은 중심 권력의 이동이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영국이 기울고 독일이 상승했다. 지금은 군사력은 아니지만 경제력 면에서 미국과 일본이 기울고 중국이 상승하고 있다. 19세기말 유럽 상황 빼닮아
이처럼 권력이 이동할 때는 정치가들이 심각한 외교적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권력이 상승하는 국가는 국제정치에서의 더 중요한 역할을 요구하는데 기존 패권국은 그런 요구를 수용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또 권력이 커 가는 나라의 지도자들은 너무 일찍 지나친 자신감을 갖고 신중치 못한 행동으로 주변국들을 겁먹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1890년 독일의 새 황제 빌헬름 2세는 외교의 귀재 비스마르크를 해임한 후 그가 조심스럽게 만들어 놓은 동맹 네트워크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의 거친 외교는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두려워하면서 결국 독일을 포위하는 연합전선을 펼치도록 했다.
2010년 중국의 공세 외교는 빌헬름 황제 시대의 독일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2010년 말 다이빙궈(戴秉國) 국무위원이 “중국이 평화 발전 노선을 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다소 안심이 되긴 했다. 그러나 일부 군부 인사가 남중국해나 다른 분쟁지역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보면 이 노선을 모든 지도부가 따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 다른 변수는 미국이다. 미국이 중국을 향해 너무 대결적으로 나간다면 동아시아 정치는 양극화될 것이다. 19세기 말 독일과 영국 간의 긴장 고조로 유럽이 양극화된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이 미중 냉전 대결을 원치 않는다면 중국을 더욱 열심히 포용하면서 효율적인 지역 안보 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이 중국에 대결적인 자세로만 나아가는 경우, 추가적인 안보 불안 요인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 필요 이상으로 과감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빌헬름 2세가 1890년대 러시아에 대한 포용정책을 중단하면서부터 독일 러시아 관계는 악화됐는데, 이는 독일이 자신에 의지해 온 오스트리아에 백지수표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됐다. 즉 오스트리아는 어떤 행동을 해도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적대국인 세르비아와 그 후견국 러시아를 지나치게 함부로 다룬 것이다. 결국 빌헬름 2세는 본인의 의도와 달리 1차 대전을 간접적으로 촉발시킨 셈이다.
일본은 과거 오스트리아와 비슷하게 계산 착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들을 성노예화했음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를 철회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만일 아베 총리가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각국의 관계는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다. 다자안보기구 만들어야
그래서 미국은 세련된 외교를 구사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상승으로 인한 일본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면서도, 동시에 일본 지도자들에게 지나친 민족주의적 행동을 삼가고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다자안보협력이 이뤄지도록 도와 준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서는 미국과의 양자동맹을 중심으로 바큇살 모양의 안보협력 틀을 구축했다. 그러다 보니 아시아 국가들 상호 간에는 직접적인 안보협력 채널이 없고 이것이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신뢰 수준을 낮게 만들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중견국이며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지역협력의 촉매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미국과 동아시아의 지도자들이 결정적인 위기가 오기 전에 효율적인 다자안보기구들을 만들어 협력해 갈 수 있을까? 그것이 현 국제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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