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작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할 때가 있다. 연구를 스스로 해본다는 기쁨에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임하지만, 곧 할 일이 많다는 것에 압도된다. 학생은 강의도 들어야 하고 시험도 봐야 하기에 진척이 느릴 때가 많다. 자주 진행 상황을 물어보기도 하고, 조력자도 붙여 주고, 조언도 하지만 잘 진행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답답해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필자가 30대 때만 해도 끝까지 기다려 주지 못하고 중간에 개입했다. 그러면 얼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논문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에너지가 30대만 하지 못하기도 하고, 더 중요하게는 조금 완성도가 낮게, 더 오래 걸려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작으나마 하나를 자기 힘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학생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고, 기억에 남는 일인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비록 한숨은 나오지만 기다리면서, 되도록 보이지 않게 돕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작은 행복을 인정하는 법을 연습하게 된 것이다.
남의 행복을 인정하기란, 그것도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의 행복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몇 해 전,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인간의 감정을 탐구한 재미있는 연구가 있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내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불운한 일을 겪었을 때 드는 오묘한 기쁜 감정이 바로 ‘샤덴프로이데’이다.
연구에서는 피험자에게 자신이 열등감을 느낄 만한 아주 잘나가는 인물을 제시하고, 이 인물에게 불운한 일이 일어났을 때 느낀 감정을 평가하고 동시에 기능성 뇌자기공명영상을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과 함께, 뇌의 보상회로가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보상회로는 마약 등을 복용하였을 때에 쾌락의 감정과 함께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이다. 아마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궁금한 내용이었기에 최고 저널인 사이언스에 실렸을 것이다.
이 연구는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가 가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답을 일부 제공한다. SNS에서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사람은 없다. 한 환자가 얘기해 준 사례가 있다. ‘강남구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명절을 맞아 가기가 싫다. 가면 같이 골프 치러 가야 하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 주시겠다고 불편하게 하신다’라는 글을 올린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환자는 이 멘션을 읽으면서 명절에 시댁에서 설거지만 하루 종일 할 자신을 생각하며 갑자기 우울해졌다고 한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은 시어머니가 본인의 집안을 무시하는 것 같아 항상 마음이 불편한 며느리일 개연성이 있지만 SNS에서 이런 어두운 면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SNS에는 이런 유의 잘난 글들이 많다.
‘행복하다’는 남의 글들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우울해질까?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까지는 착한 남편, 말 잘 듣는 아들을 보면서 행복했는데, 친구가 한 부분에서 나보다 더 행복하면, 마치 내 행복이 줄어드는 듯 생각돼서일 것이다.
SNS 때문에 우울하다는 환자에게 SNS를 모두 탈퇴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돌아볼 시간, 자기 자신의 행복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계수해 볼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렇다면 SNS에 행복한 모습을 끊임없이 올리는 사람은 좀 나은 처지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가끔은 모두가 볼 수 있는 인터넷에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 보이는 행동은 일종의 노출증은 아닐까 생각하게도 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노출을 하는가? 자기 자신 그대로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일종의 ‘비준’을 해 주어야 비로소 나 자신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서이다.
이런 성격 특성의 극단적인 예가 ‘연극성 인격 장애(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갈구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이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왜 한국에만 들어오면 조금이라도 스트레스가 늘어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남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 풍토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의 행복과 내 행복, 남의 성취와 내 성취를 비교해 내 것이 더 커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즉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고 항상 어느 누구는 우울하고 불행해야만 하는 구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의 행복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으면 나를 나 자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내가 더 똑똑하지 못하고, 내가 더 돈이 많지 못하고, 내가 더 권력이 있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옆의 넓은 경작지가 남의 것인들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내 몇 평 안 되는 밭을 일구는 것을 뜻한다.
남의 행복을 인정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내 영향력을 넓히고, 내 성취를 더 높게 하는 데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작은 빵집 주인의 작은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대기업에서 제빵 사업에서 철수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남의 행복을 인정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다른 이의 행복을 더 키우려고 노력한다면 신기하게도 내 행복이 커질 때가 많다.
몇 해 전에 위에서 말한 샤덴프로이데 논문이 실린 같은 저널에 다른 논문이 하나 실렸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만큼 행복감에 중요한 것이,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이라는 논문이다. 미국 인구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대상군을 평가했을 때에, 번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이 쓰면 쓸수록 행복감이 높아졌다. 유아들조차 다른 이에게 맛있는 과자를 주었을 때, 자기가 받을 때보다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록펠러는 50대 중반에 앞으로 1년 이상은 더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다 병원에서 벽에 걸려 있는 글귀를 보았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라는 것이다. 평범한 글이지만 그의 뇌리에 박혔다. 이 글을 보고서는 입원비가 없어 울고 있는 사람의 입원비를 비밀리에 대신 내주었고, 그때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록펠러는 이후 많은 자선사업을 했고, 의사들의 말과는 다르게 90세 이상이 되기까지 장수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아침 신문에 실린 이 글을 보면서 “가장 가까운 이의 행복이나 보장하라”라고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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