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가해자와 피해자 입장은 1000년이 흘러도 안 변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2일 03시 00분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제94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1000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며 일본의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의 동반자가 되려면 역사를 직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그럴 때 비로소 양국 간의 신뢰와 화해, 협력도 가능하다”는 언급도 했다. ‘미래’도 얘기했지만 ‘과거 청산’에 무게가 있다.

3·1절 기념식은 역대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가 공식행사여서 국내외의 관심이 높다. 박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첫 3·1절 기념사에 비해 강한 어조로 일본의 변화와 책임을 촉구했다. 다만 독도나 군대위안부를 언급하지 않은 데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라는 말을 한 번만 사용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일본의 중국 침략 와중에서’라는 구절에서 일본을 한 번 언급했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본을 언급조차 안 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미래로 가자. 그러나 역사를 외면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과거에만 얽매여 있을 수도 없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길지도 않았고 온건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은 것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무게를 두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역대 정부는 임기 초에는 한일 관계가 괜찮다가 임기 말로 가면 악화하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YS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을 해 양국 간에 찬바람이 불었다. DJ는 일본 문화 개방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결국 역사교과서 파동을 겪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일본과 각박한 외교전쟁도 있을 수 있다”는 선전포고식 발언으로, MB는 지난해 8월의 독도 방문과 일왕 관련 발언으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는 말을 들었다. 한일 관계는 ‘시시포스의 도로(徒勞·헛수고)’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한국 대통령의 실패는 과거사를 부인한 일본에 책임이 있다.

박 대통령은 일본에서 ‘1000년 대통령’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 언론들은 박 대통령의 기념사를 소개하며 관계 개선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예상보다 발언이 강했다는 뜻이다. 한일 간에는 독도, 군대위안부, 역사교과서 등 지뢰밭이 깔려 있고 일본 지도자의 망언이라는 돌발 변수도 있다. 이달 말경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가 또 한 차례 고비가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과 달리 임기 초에 일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 말의 무게를 보여주되 앞으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일은 자제하고, 전문가와 참모의 의견을 존중하며, 국익과 과거사를 현명하게 분리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 한일 문제는 차분한 이성보다는 ‘국민 정서’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은 종종 그에 편승하고 싶은 유혹이나 강박에 빠진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감정적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양국 국민의 심리적 거리만 더 멀어지게 했다. 지도자가 중심을 잡아야 그나마 관계 악화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과거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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