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 마을과 길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 저처럼 낮게 엎드려 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나의 마음들은 밤하늘 광활한 백지에 활자가 되어 빛나고 억새의 늦은 울음을 한 아름씩 산등성이에 뿌리고 있었다. 입동(立冬) 지나면 나의 그리움도 고뇌에 찬 나의 시편들도 억새풀처럼 날려 사라져 가겠지만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번져가는 밤하늘은 또 누가 쓰고 누가 반송한 소식들로 쌓이는지 나는 그 어둠의 겉봉을 접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는 게 어두워지는 건데, 시간이 땅거미에 이끌려 한 걸음 두 걸음 어두워지고 있다니, 첫 두 행부터 상상력과 표현이 신선하다. 전체적으로 어둠의 이미지가 ‘빛나는’ 시다. 시인의 맑은 마음과 밝은 눈이 돋보이는 시정(詩情) 넘치는 시다. 시간(時間)이 흐르며 시간(詩看)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밤의 어둠 속에 숨었던 사물들이 낮에는 제 몸뚱어리를 드러낸다. 그것이 빛남의 본디 모습이다. 그러나 ‘마을과 길들은/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어둠 속에 제 몸을 숨기고 있다. 그 사물의 몸과 함께 어둑해진 마음은 공손한 마음, 낮게 엎드리는 마음이다. 밤하늘을 백지에, 마음을 활자에 견준 것 역시 참신하다. 그리움이든 시편이든, 누군가에게 보낸 화자의 마음과 사연. 화자가 본 밤하늘은 커다란 편지지다. 그는 제 마음과 사연을 담은 편지를 어둠이라는 편지봉투에 넣고 그 겉봉을 접는다. 그러나 밤하늘은 화자를 포함한 숱한 사람들의 마음과 사연으로 여전히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수취인이 없어서 반송된 마음과 사연들로.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