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여러 면에서 아주 특별한 사이였다. 식민 지배의 쓰라린 기억은 한국인의 정신에 반일(反日)이라는 강한 DNA를 심어 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 근대화를 위해 벤치마킹한 것은 일본이었다. 한국은 일본이 세계 선두를 달리던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선정해 집중 육성했고, 그 결과 일부 산업에서는 일본을 추월했다. 근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등 일본 주요 전자업체 영업이익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이 이룩한 고도성장은 1970, 80년대 한강의 기적과 더 빠른 압축성장으로 한국에서 구현됐다. 자민당이라는 ‘1.5정당체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정부 주도형 시장경제는 한국에서 권위주의 개발 독재로 나타났다. 일본이 간 길을 한국이 대략 10년 후에 뒤따라가는 일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패턴으로 고착화됐다. 이는 ‘선진국 추격’을 국가발전전략으로 채택한 한국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본은 한국에 어떤 대상인가. 1990년대 초 거품 붕괴로 시작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20년으로 연장됐다. 저출산 고령화의 심화, 제로금리에도 늘지 않는 투자, 디플레이션에도 꽁꽁 얼어붙은 소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국가부채, 프리터·니트·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도전정신 상실, 위험 감수에서 위험 회피로의 사회 풍조 변화, 60세 이상 유권자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정치 등으로 일본의 국력 쇠퇴는 구조화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에서도 이러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거품 붕괴 시점인 1990년대 초반은 15∼64세 생산 가능 인구 증가율이 피부양 인구의 증가율보다 높은 시기인 ‘인구 보너스기’의 종료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의 경우 2015년 인구 보너스기가 종료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6년부터는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든다. 한국의 고령화는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출산율 또한 일본보다 낮다. 경제 역시 고성장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3% 이하의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있다. 청년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공무원, 공기업 등을 무제한으로 선호하는 ‘철밥통 신드롬’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복지 욕구는 분출하고 있어 한국경제의 최대 강점인 재정 건전성이 악화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이제까지 한국은 일본의 성공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앞으로는 일본의 쇠퇴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쇠락하는 일본을 한국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일본은 경제 대국의 위력, 연간 2000억 달러를 넘는 해외 투자 수입 등으로 쇠퇴의 곡선이 완만하지만, 한국의 경우 급격하게 진행될 개연성이 높다. 이제 한국은 일본을 이겨 보자는 극일을 넘어 일본과 같은 국가 쇠퇴를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초일(超日)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핵심은 복지와 성장을 창조적으로 융합하는 ‘복지경제’의 전면적 실행이다. 워킹 맘과 워킹 실버를 파격적으로 우대하고, 마이스터고 확대 육성과 적극적 이민 정책을 통해 생산 가능 인구의 75% 이상이 일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쇠퇴를 최소화하고 재정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의 일본화는 이제 모두가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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