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손손 역사에 족적(足跡)을 남긴 명문가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조선시대 대제학을 가장 많이 배출했으며 문과 합격자만 200명이 넘었던 연안(延安) 이씨 가문은 ‘넘침을 경계하라’는 뜻의 계일(戒溢)을 가훈으로 삼았다. 세조 때 대사헌을 지낸 저헌(樗軒) 이석형(1415∼1477)은 만년에 성균관 서쪽 연못에 계일정을 짓고 수신(修身)했다. 물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듯 매사에 분수를 지키려 노력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면서부터 지인들이나 외국 손님들에게 계영배(戒盈杯)를 선물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70% 이상 술을 따르면 밑으로 몽땅 빠져 버리는 이 잔의 교훈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비극의 사례가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가문이다. 부친(父親)의 맞춤형 교육으로 ‘만들어진’ 천재 괴테는 41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도 자기가 받았던 교육방식으로 키우려고 애썼다. 괴테의 아들은 학습, 진학, 취직은 물론이고 부대배치까지 간섭하는 아버지의 관심과 기대를 견뎌내지 못했다. 아들은 결국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이탈리아 여행 중 요절했다. ‘붓 재주 하나로 대성할 생각을 말라’는 좌우명으로 자유와 재능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던 남종화의 거장 소치(小癡) 허련(1808∼1893)의 집안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전남 진도를 중심으로 5대 200년에 걸쳐 13명의 화가를 배출해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뤄낸 소치 가문은 재주꾼과 거장은 다르다고 봤다. 아무리 시(詩)·서(書)·화(畵)에 재주가 많더라도 폭넓은 지식과 품 넓은 인성이 없으면 거장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베풂의 삶을 실천한 소치의 손자 남농(南農) 허건의 유산은 특별하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가 머물던 목포 집은 늘 그림을 얻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도 그림 적선(積善)을 많이 하는 바람에 그림값이 떨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인이나 평민들이 몰래 곳간의 곡식을 퍼가도 모르는 체했다’고 전해오는 전라도 담양 고부잣집 사람들이 남긴 유산도 아마 배려와 나눔의 미학이리라.
▷경주 최부잣집 큰집인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가 ‘만석 이상의 재산을 쌓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계승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고문헌 3000점이 발견돼 화제다. 노비나 소작인의 빚을 탕감해 주고 병자호란 중 전사한 충노(忠奴)를 표창해 달라는 등의 내용이 많다고 한다. 화적(火賊) 떼의 습격으로 인명과 재산 손실을 본 뒤 상생의 길을 찾기 위한 방책이었다. 증오가 아닌 솔선으로 주위를 밝게 만든 최씨 가문의 선견지명은 오늘날에도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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