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단추를 채우면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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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1942∼)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현재 심사정의 ’버드나무와 매미, 호박과 메뚜기’.
현재 심사정의 ’버드나무와 매미, 호박과 메뚜기’.
두번 연거푸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자신이 다닌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인 아버지를 떠올리면 상심은 더욱 깊었을 터다. 결국 3년제 예술학교를 다닌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타향에서 직장도 없이 덜컥 결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생계를 책임진 아내 대신 6년간 육아와 집안일을 맡는다. 고달픈 시절에도 꿈을 품고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고 이 작품들은 그가 감독으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돼주었다.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째 수상한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의 얘기다. 수상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모든 불이익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점도 있더라”라고 했다. 대입 실패와 백수 시절을 거치는 동안 얻은 게 잃은 것보다 많았다는 체험적 증언처럼 들렸다.

18세기 조선의 대표적 문인화가 현재 심사정(1707∼1769)의 화조화를 최근 한 화랑에서 마주했을 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인생의 첫 단추부터 어긋난 삶을 살아야 했던 현재가 뼈저린 고독 속에 완성한 명품들이었다. 그는 증조부가 영의정을 지낸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가 과거 시험 부정과 역모 죄에 연루된 탓에 자기 실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 응시도, 출세의 기회도 원천 봉쇄됐다. 선비로서 다른 생업을 찾기 힘들었던 시대에 그는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아 그림에 생애를 걸었다. 곤고한 나날 속에서 단 하루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현재는 훗날 조선 남종화풍을 확립한 대가로 평가받는다.

새 학기를 맞아 대학 캠퍼스마다 풋풋한 새내기들이 북적일 때 세상에서의 첫 실패라는 쓴맛을 본 또래 청춘들은 불안과 좌절감 속에 재도전을 시작했다. 반듯한 직장을 잡은 사회 초년병들이 활기차게 출근할 때 상반기 취업시즌을 목표삼아 ‘백수 탈출’을 외치는 청년들의 발걸음도 분주하다. 천양희 시인의 ‘단추를 채우면서’는 첫발부터 잘못 뗀 것은 아닌지, 주눅 든 청춘남녀에게 깨달음과 위로를 전한다. 어긋난 첫 단추가 마지막 단추까지 인생을 좌지우지 흔들지 않도록 조급증을 부리지 말고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넌지시 권한다. 어둠 속에서 밝음이 오고, 겨울 속에서 서서히 봄이 꿈틀거리듯 제 약점과 불완전함을 직시할 때 자신의 진정한 힘도 찾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대로 살다 보면 단추 채우기 같은 사소한 일상도 어긋나기 십상이다. 입시와 취업의 치열한 관문을 지나가며 한 방 크게 얻어맞았다고 실패한 청춘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속도전이 아니라 다소 시간이 걸려도 완성을 향한 여정으로 보는 자세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인생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란 말을 떠올리며 불끈 용기를 내보는 거다. 잘못 채운 단추를 바로잡는 유일한 길은 단추를 풀고 첫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단추를 채우면서#시#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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