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신연수]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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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1일 03시 00분


장애아동 가정 절반이 파탄… 어린이재활병원이 시급한 이유다

‘사람을 사랑하다-애인(愛人).’ 푸르메재활센터 건립을 도운 3000명의 후원자 명단 앞에 선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애인이란 글씨는 재단 이사장인 김성수 성공회 주교가 썼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사람을 사랑하다-애인(愛人).’ 푸르메재활센터 건립을 도운 3000명의 후원자 명단 앞에 선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애인이란 글씨는 재단 이사장인 김성수 성공회 주교가 썼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1층에 들어서니 ‘행복한 베이커리&카페’가 눈에 띈다. 오전 9시인데도 제법 붐비는 카페. ‘장애인 친구들의 행복한 일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아메리카노 2000원, 카페라테 2500원. ‘착한 가격’이다. 카페라테 한 잔을 주문한 뒤 장애인이 어디 있나 살펴봐도 눈치챌 수가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페 직원은 자폐증 등을 앓는 젊은이들이었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이 4층 건물은 장애어린이들을 위한 ‘푸르메재활센터’다. 가끔 이 동네 앞을 지나다녔지만 이런 시설이 있는 줄 몰랐다. 마음의 눈을 감은 탓이리라. 1층에는 카페 말고 치과도 있고 2층에는 한의원, 언어치료실, 감각통합치료실이, 3층엔 장애청소년과 지역주민들이 사용하는 종로장애인복지관 등이 있다.

2005년 푸르메재단(이사장 김성수 성공회 주교)을 설립하고 모금활동을 벌여 지난해 이 센터를 세운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는 4층에 근무한다. 같은 신문사 동료였을 때는 조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퇴직하고 사회운동을 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는 1998년 독일 연수 시절 영국 여행을 갔다가 부인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장애인 재활의 중요성과 한국의 현실을 알게 됐다. 그 후 장애인 재활전문병원 건립에 헌신해온 건 많이 알려진 터.

“처음 이 근처에 사무실을 차렸을 때 휠체어를 탄 장애인 한 명이 찾아와 말하더군요. ‘이가 아파요.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요. 동네 치과는 보통 2, 3층에 있어 장애인들이 가기 어렵고, 들어가도 치료를 거절한다는 거예요. 그분도 치료를 못 받아서 잇몸이 몽땅 상했더라고요. 그래서 2007년 제일 먼저 시작한 게 요 옆 건물 1층의 장애인 치과였어요.”

장경수 당시 서울대 치대 교수가 제자와 후배 12명을 데리고 와서 자원봉사를 했다. 장애인 한의사 허영진 씨는 한의원을 열고 무료로 진료했다.

“민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세 살 때 우리 센터에 왔는데 목도 못 가누었어요. 1년 반 치료 받고 지금은 걸어 다닙니다. 꾸준히 침을 맞고 한방 치료를 받은 덕이지요. 민이 엄마가 감격에 겨워 울면서 전화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 민이가 걸어요!’”

장애인 재활 중에서도 장애어린이 재활 확대가 가장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장애의 90% 이상은 후천성입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멀쩡하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장애 어린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산아로 태어나거나 독감 같은 질병에 걸렸다가 장애가 올 수 있어요. 어릴 때 빨리 집중치료를 해주면 60∼70%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평생 부모나 보호자, 사회가 돌봐야 하는 거죠.”

국내에 어린이재활전문병원은 경기 성남시의 보바스어린이병원 하나뿐이다. 장애인재활병원은 적자를 보기 때문에 민간에서 운영하기 힘들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들도 골치 아프다고 외면한다. 서울대병원 삼성의료원 등 종합병원에 재활의학과가 있긴 하지만 비싸고 부족하다. 장애가 발생하면 장기간 재활치료가 필요한데 대부분 급한 치료를 마치면 퇴원해야 한다.

정부에 등록된 장애인 수는 2000년 144만 명에서 2005년 214만 명, 2011년 268만 명으로 계속 늘고 있다. 인구 100명당 장애인 수도 2000년 2.98명에서 2011년 5.47명으로 늘었다. 고령화에다 각종 사고와 만성질환 때문이다. 19세 이하 장애아동의 수는 9만5000여 명.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가족이 져야 합니다. 제가 만난 장애아동 가운데 절반 정도는 가정이 파탄 난 것 같아요. 엄마는 장애아를 돌보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그러다 이혼을 하죠. 장애어린이의 형제자매는 부모의 관심을 못 받아 탈선하는 경우도 많고….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장애어린이를 치료해서 사회에 내보내는 비용이 1이라면 그냥 방치했다가 사회가 평생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3 정도로 추산된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푸르메재활센터는 22명의 의료진이 매일 100∼150명의 장애어린이를 치료한다. 치료사 1명이 장애어린이 1명을 40∼50분 치료하고 5000원을 받는다. 좋은 시설에 저렴한 치료비, 따뜻한 보살핌 때문인지 대기자가 세 달이나 밀려 있다.

이 센터는 낮에만 운영한다. 재단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입원실을 갖춘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병상 100개에 하루 500명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으로 올해 10월 착공해 2015년 완공이 목표다. 총 400억 원의 건립비 가운데 온라인게임업체 넥슨 창업주 김정주 대표가 200억 원, 서울시와 보건복지부가 56억 원을 분담하기로 했다.

“독일이나 영국처럼 환자가 중심이 되는 병원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족들은 환자를 만나서 대화만 하고, 병원이 치료에서 간병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을 도입할 겁니다. 또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합니다. 우리는 옆 사람이 다 해주지만 선진국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손을 잃은 사람에겐 포크와 나이프를 팔에 고정시켜 사용법을 훈련시킵니다. 아주 고통스럽죠. 하지만 2주에서 한 달이 되면 혼자 할 수 있고 그 사람은 평생 남의 도움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자하문로 재활센터는 지난 6개월간 1억7000만 원, 한 달에 3000만 원씩 적자를 봤다. 상암동에 재활병원이 생기면 아주 짜게 운영해도 1년에 20억 원 적자는 각오해야 한다. 걱정이 돼서 “그렇게 적자를 보면서 어떻게 운영할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올해도 삼화모터스가 1억 원, KB금융이 1억 원을 지원해 주기로 했어요. 정말 안 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의인(義人)이 나타나서 도와주더군요”라며 웃었다.

세상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남을 돕는 일은 쉽지 않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바빠서, 자선단체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이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모아서 수백억 원 규모의 사업을 추진하는 건 강한 의지력과 인내심, 추진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조용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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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메재단 어떻게 운영되나

2015년 완공될 마포 어린이재활병원 조감도.
2015년 완공될 마포 어린이재활병원 조감도.
푸르메재단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태어나서 자라왔다. 백경학 이사는 2005년 재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책을 냈다.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 씨를 비롯해 고(故) 김근태 의원, 탤런트 김혜자 씨, 박원순 서울시장 등 유명 인사들의 글을 모아 ‘사는 게 맛있다’(이끌리오)는 책을 냈는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평소 모습이 박완서 씨와 닮았다는 말을 듣던 백 이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박 씨에게 e메일을 보냈다. 재단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제 별명이 박완서 동생입니다. 조금 큰 앞니와 처진 눈매 때문에 선한 인상과 따뜻한 미소를 지니신 선생님을 제가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라고 썼다. 그 후 박씨는 책을 펴낼 때마다 첫 인세를 재단에 기부했다. 고인의 뜻을 이어 박 씨의 딸 호원숙 작가도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에 기금을 냈고, 소설가 신경숙 씨도 평소 존경하던 문단 선배를 따라 기부에 동참했다.

재단 홍보대사인 가수 션은 매일 아침 ‘장애어린이를 위한 재활병원 기금을 모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후원금 1만 원을 저금통에 넣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매일 1만 원씩 1년에 365만 원을 기부하는 ‘만 원의 기적’ 후원자들을 모으기 위해서다. 션의 소개로 가수 싸이 빅뱅 지드래곤 2NE1, 탤런트 최수종 차인표, 야구선수 박찬호 류현진, 축구선수 이영표 등 250명이 ‘만 원의 기적’에 동참하고 있다.

벤처기업가 이철재 씨는 우연히 재단 앞을 지나가다가 자발적으로 기부한 경우. 그는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척수장애를 얻었으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한 ‘인간승리’의 주인공. 자신이 창업한 ‘쿼드디멘션스’라는 회사를 온라인 게임업체 넥슨에 판매한 뒤 그 일부인 10억 원을 내놨다. 이것이 인연이 돼 넥슨은 어린이재활병원에 200억 원을 쾌척하기로 했다.

소프라노 조수미 씨는 기아자동차 K9 광고모델료 8000만 원을 보탰다. 조무제 전 대법관은 법원조정센터 월급의 20%를 기부하고,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정태성 교수는 가족 4명 모두가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백 이사와 부인 황혜경 씨는 자신들이 받은 교통사고 피해보상금 등 12억7200만 원을 기부해 재단 설립의 씨앗으로 삼았다. 이 밖에 일반 시민 5000여 명의 정성이 재단을 이끌고 있다.

기부 참여 문의 : 02-720-7002, hope@purme.org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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